온 가족이 경험한 홋카이도 겨울 아웃도어 체험
“모이는 장소 아시겠죠? 고원장 여관 주차장이에요. 페트병 잊지 마시고 추울지 모르니 아이들 옷 든든히 입혀서 오세요.”
익숙한 켄상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울려퍼진다.
오늘은 히다카 역장에서 주최하는 히다카 자연트래킹을 가는 날. 히다카 마을의 우리의 막역한 친구 다카하시 켄이 이 이벤트의 담당자이자 트래킹 가이드이다. 행사날짜 잘 까먹고 시간도 맨날 헷갈려하는 고베에서 온 어리버리 친구가 걱정돼, 트래킹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확인전화를 준 것이다.
켄상이 3년 전에 기획한 히다카 자연트래킹은 이제 꽤나 입소문이 나서 삿포로 등 홋카이도의 인근 도시에서도 참가자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작년에 우연히 참가했다가 좋아서 올해도 또 멀리 규슈에서 일부러 비행기 타고 날아오시는 분들도 있을 정도라고.
켄상 당부대로 아이들 옷을 단단히 챙겨입히고 모자와 장갑을 챙긴 후 집을 나선다.
“곰순아, 우리 다녀올께. 심심하겠지만 좀만 참고 있어~”
곰순이가 저만 두고 우리끼리 나갈 때의 특유의 슬픈 표정으로 현관에 우뚝 서서 쳐다본다.
“맞다. 페트병!”
아니나다를까, 그새 또 깜빡했다. 남편과 아이들을 잠깐 기다리라 하고 얼른 집으로 다시 들어가 아까 헹구어놓은 페트병 두개를 챙겨넣었다. 이 페트병을 왜 가져오라고 했는지는 아직 미스테리이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 고원장 여관 주차장에 도착, 두리번 두리번 켄상을 찾았다. 트래킹에 참여하려는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이 모여있길래 그리로 가보니 켄상을 비롯한 역장 직원 몇명이 보인다.
우리 가족 이름을 확인더니 옆에 쌓아놓은 스노우슈를 가족 당 한켤레씩 가져가서 신발에 장착하라고 한다. 우리가 걸어갈 트래킹 코스는 제설작업을 하지 않은 숲길이라 겨우내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그 깊이가 1미터는 되니 스노우슈가 없으면 눈 속에 푹푹 파묻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니 스노우슈는 겨울 트래킹의 필수장비인 셈이다.
어른용 스노우슈는 투박한 메탈인데 비해 아이들용은 연두색 나뭇잎 모양의 깜찍한 디자인. 아이들에게 스노우슈를 장착시키자 벌써 신났다고 그걸 신고 사방을 뛰어다닌다.
다른 한쪽에서는 참가자들이 다들 페트병을 들고 줄을 서 있길래 일단 나도 가져온 페트병 두개를 들고 뒤에가서 섰다.
“페트병 가지고 뭐하는거래요?” 앞에 서 있는 한 중년 여자분에게 물어보았다.
“아이스크림을 만든다나봐요. 여기에 우유를 담아준다는데,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만든다는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
내차례가 되고나서 담당직원에게 페트병 두개를 내미니 우유같은 것으로 보이는 액체를 페트병에 담아준다.
“이건 우유인가요?”
“우유와 생크림, 설탕과 바닐라엑기스를 섞은거에요. 저쪽에 보이는 큰 페트병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눈을 담으신 후 저쪽 마대자루에 있는 소금을 넣으세요. 그리고나서 큰 페트병 안에 방금 드린 액체가 들어있는 페트병을 넣으면 됩니다”
여전히 이 액체가 어떻게 아이스크림이 된다는건지 이해가 안된다. 가운데가 절단되어 있고 양쪽에 기다란 노끈이 달린 큰 페트병 두개를 집어들고 일단 가족들이 기다리는 바깥으로 나갔다. 마침 켄상이 보이길래 당장 질문의 화살을 날렸다.
“아니, 큰 페트병에 눈과 소금은 뭐고, 이걸로 어떻게 아이스크림을 만든다는거에요?
특유의 사람좋은 웃음을 머금고 켄상 강연 시작.
“큰 페트병에 눈하고 소금을 넣고, 그 안에 작은 페트병을 넣은 다음에 큰 페트병을 허리춤에 차고 트래킹을 하는동안 바닥에 끌고 다니는거에요. 차가운 눈밭을 굴러다니는 동안 작은 페트병 안의 액체들이 섞이고 큰 페트병 안의 소금과 눈에 의해 더욱 차갑게 냉각이 되요. 트래킹이 끝날 때쯤 되면 아마 맛있는 아이스크림으로 변해있을걸요.”
아하, 이제야 알겠다. 이거 정말 재미난 과학실험이군. 아이들은 켄상의 설명을 듣고는 아주 신이 났다. 얼른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고싶은 생각에 서둘러 동강난 큰 페트병 양쪽에 눈을 담기 시작했다. 눈을 담은 후 시키는대로 자루 안의 소금을 넣고, 켄상이 일러주는대로 덕테이프로 동강난 자리를 동여맸다. 그리고 큰 페트병에 달려있던 노끈을 아이들 허리춤에 묶어주니 아이스크림 만들 준비 끝! 이제 트래킹만 열심히 다니면 되겠구나.
트래킹 코스는 히다카 마을 사루강 캠핑장을 가로질러서 인근 숲을 지나 야트막한 산정상이 최종 목적지이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숲속의 흰 눈밭을 스노우슈를 신고 걸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중간중간에 히다카의 자연과 역사에 대한 켄상의 해박한 가이드 설명이 몇 차례 이어지고. 아이들은 페트병을 떼굴떼굴 끌고다니며 군말없이 잘도 따라온다. 아이스크림 먹을 생각에 평소같으면 나왔을법한 불평 한마디 없다. 아이들이 워낙 잘 따라가니 켄상은 민재에게 트래킹 깃발을 맡긴다. 켄상의 일일 조수가 된 셈이다. 이 아이스크림 페트병 아이디어 참 훌륭하구나 싶다. 기획자는 당연히 켄상이겠지! 히다카역장의 최고의 일꾼이자 아이디어맨인 켄상 아닌가.
중간중간에 토끼발자국, 여우발자국도 눈에 띈다. 바야흐로 산 속 깊숙이까지 들어온 우리는 스노우슈를 신어도 푹푹 빠지는 깊은 눈밭을 걸어갔다. 일행을 잠깐 멈추게 한 켄상.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휴식을 취하는동안 저와 직원들이 천연 미끄럼틀을 만들 것입니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켄상을 비롯한 3명의 역장 직원들이 가파른 언덕길을 눈을 헤치며 올라가더니 가져온 썰매를 이용해 언덕배기 눈을 다지기 시작한다.
어느틈엔가 눈쌓인 언덕 중간에 가파른 미끄럼틀이 완성되었다! 이미 기분은 어린시절로 돌아간 우리 일행은 켄상의 지시에 따라 언덕길에 한줄로 길게 줄을 섰다. 제일 위에 선 사람부터 미끄럼을 타는 것이다. 여자직원 한명이 시범을 보여주었다. 언제 또 준비해서 가져왔는지, 종이박스와 비닐로 만든 간이썰매를 엉덩이에 깔고 거의 눕듯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밑에 멈추는 곳에는 폭신한 눈이 쌓여있으니 빨리 내려가도 위험할 일은 없어보였다. 그렇긴 해도 내려가는 속도와 길이가 범상치 않다! 과장해서 미니봅슬레이 정도? 이거 약간 떨리기까지 시작한다.
아이들은 약간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에 가득찬 얼굴로 차례를 기다렸다.
먼저 아빠차례,
“야호, 우워어어어어~” 기세좋게 출발했는데 속도 제어가 안되니 겁이 나는지 고함을 지른다.
겁없는 민재군은 일자로 누워서 속도를 오히려 높인다. 와, 보기만 해도 아찔하군. 보무도 당당히 저 밑 눈에 가서 처박히는 민재군. 그래도 좋다고 신나는 웃음이 얼굴 한가득이다.
“또 탈래요!”
소심한 연수는 그냥 앉아서 썰매타듯 타니, 가벼워서인지 중간에 멈춰버린다. 아빠의 도움으로 미끄럼틀 밖으로 구조된 연수.
그 다음은 내차례. 이런 종류의 놀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내가 아니던가. 두근두근 한껏 기대되는 마음으로 출발!
“으아아아아아아아~~”
감상은? 아, 정말 끝내줬다! 미끄러지면서 보는 눈앞의 풍경도 아름답고, 경사와 스피드도 딱이고. 무엇보다도 자연의 눈을 헤치며 달려가는 느낌이 너무너무 좋다.
그후로 한 세차례 정도 구르고 전복을 거듭하며 신나게 천연 눈 미끄럼틀을 즐겼다.
한바탕 즐거운 놀이시간이 끝난 후 산 정상에 올라가니 직원들이 언제 또 준비해온 따뜻한 코코아를 나눠주었다. 설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마시는 코코아는 꿀맛이었다. 잠시 앉아 함께 트래킹하고 미끄럼타며 친해진 일행들과 서로 통성명도 하고 얘기도 나누었다.
이제 왔던 길을 거슬러 돌아갈 시간. 아이들 허리춤에 다시 페트병 노끈을 묶어주고 눈밭을 나섰다. 캠핑장 근처 숲까지 돌아오니 홋카이도의 수목에 대한 켄상의 마지막 강의. 그의 제안으로 우리 일행은 다들 자기 나무 한그루씩 정한 다음 하늘을 보고 드러누웠다. 눈침대가 어찌나 폭신하고 따스하게 느껴지는지. 히다카의 구름낀 겨울하늘 속에 겨울나무들과 가지들이 가득 펼쳐져 있었다.
잠시 그렇게 아이들과 나란히 누워 겨울숲과 나무가 주는 고요를 즐겼다. 눈을 털고 아쉬운 마음으로 일어나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나섰다. 연수와 민재는 선두인 켄상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서 페트병을 데굴데굴 굴리며 척척 잘도 걷는다. 이 트래킹이 충분히 즐거웠다는 증거이리라.
출발했던 고원장 여관 주차장으로 돌아와 스노우슈를 반납하고, 함께 즐거운 추억을 공유한 일행들과 작별의 인사를 했다. 훌륭한 우리의 가이드 켄상에게도 마음깊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저녁에 해물 듬뿍 넣은 파전 해서 갖다드려야지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아이스크림! 페트병을 개봉하여 소금과 눈을 털어낸 후 그 안의 작은 페트병을 고이고이 꺼냈다. 만세! 페트병 안의 액체들이 보기에도 맛있어보이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변신! 트래킹 내내 끌고 다닌 보람이 있구나!
그렇게 만든 천연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었는지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