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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Apr 10. 2021

늙을 수 있는 기회

나는 아직 늙을 수 있는, 고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람이다.

  2주 전엔가 본가에 내려가서 벚꽃 구경을 하다가 낯이 익은 가게를 마주쳤다. 엄마가 이혼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한복을 배웠던 바느질 학원이었다. 원래는 다른 동네에 있었는데 그 곳으로 이사를 한 듯 했다. 

  3일 만에 혼수상태에 빠져 너무 급히 돌아가신 엄마라 누구에게 어떻게 부고를 알려야 할지 몰랐었는데 번뜩 그 원장님이 생각이 나서 엄마 핸드폰으로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원장선생님은 제일 먼저 장례식장에 와주셨고 함께 엄마 핸드폰을 붙잡고 누구에게 연락을 할지를 알려주셨다.      


  내가 2살 때 우리 가족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야구방망이를 들고 찾아온 상간녀 남편의 소동으로 인해 아빠의 바람이 온 천지에 발각되었다. 그 상간녀의 남편이 당장 아빠를 잘라버리라는 전화를 회사에 밤낮으로 해대는 탓에 회사도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어 할머니가 계신 아빠의 고향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그렇게 잘리듯 그만둔 회사에서 나온 아빠와 살면서 이혼의 씨앗을 키워갔고 그 씨앗이 드디어 싹을 틔운 것이 원장선생님의 바느질 학원에서였다. 바느질을 배우며 혼자 살아갈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바느질학원은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엄마는 나를 맡길 곳이 없어 꽤 자주 나를 바느질 학원에 데리고 갔다. 초등학교 저학년때라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원장선생님의 딸, 아들이 나랑 나이가 비슷해서 같이 놀기도 했고 밤 늦게 수업이 있을 때는 꾸벅 꾸벅 졸면서 엄마 옆에서 천 조각을 이어 붙이며 시간을 보냈다. 원장선생님은 까만 머리가 풍성하게 파마를 하셨고 직접 만드신 한복을 입고 나에게 항상 아주 다정하셨다.     


  그랬던 그 가게를 우연찮게 마주하니 반갑기도 하고 또 감사인사도 전하고 싶어서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이런저런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 직접 만드신 한복을 구경했다. 엄마가 만들던 스타일의 한복이 쭉 걸려있었는데 옷걸이를 하나씩 넘기며 한복들을 보고 있자니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그리고 원장선생님 얼굴을 보는데 참 많이 늙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까만색에 풍성하게 파마를 했던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단정하게 하나로 낮게 묶어 말아 올린 상태였다. 눈가와 입가에는 주름이 있었고 눈동자에서도 지난 세월이 느껴졌다.   

  

  가게를 나와 활짝 핀 벚꽃을 다시 마주했을 때 내 마음속에 따뜻함이 퍼졌다. 이 벚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작년에 봤던 이 봄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늙어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지만 사소한 이 모든 순간이 새롭게 느껴졌다.     


  작년엔가, 엄마가 같이 운동 하는 아줌마들과 찍은 단체 사진을 보여주며 누가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냐고 나에게 물었다. 

  “이 중에 누가 제일 나이 많아 보여?”

  “음.. 엄마.”

  “힘(힝을 더 귀엽게 말하는 우리만의 표현이었다.)!!”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냥 엄마 눈빛이 늙었어.”

  “헐~~~~ 왜?”

  “엄마 눈빛에 고생한 세월이 담긴 거 같달까?ㅋㅋㅋ”     


  그 때는 몰랐다. 늙어갈 수 있는 것도 기회라는 것을. 나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분께는 아직 그 기회가 있다. 늙는 것도, 고생하는 것도, 지치는 것도 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그렇다. 숨을 마시고 내쉬는 찰나의 순간까지 무한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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