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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유리 Apr 20. 2021

나는 거미를 사랑해

거미를 사랑하게 한 시 백석의 <수라>

  우리 학교 음악실은 지하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어둑어둑하고 습기가 많아 각종 벌레가 종종 등장한다. 오늘 별안간 음악실에 들어오던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왜 그런가 하고 복도로 나가 보니 까만 거미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악보 위에 거미를 고이 올려 행여나 다칠까 조심조심 바깥으로 데려다 주었다.


  남자 고등학교라 다들 키도 덩치도 나보다 배는 큰데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거미 한 마리에 아무도 못 나서고 벌벌 떨고 있는 모양새가 참 웃겼다. 그 사이를 헤치고 멋지게 거미를 구조했더니 상당히 뿌듯했는데 갑자기 학생 하나가 나한테 말 했다.     


  “선생님 시골에서 자라서 거미 안무서워하세요?”

  “그래!”     


  대답은 그렇다고 했지만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거미를 무서워하지 않는 다는 말은 틀렸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 까지는 거미를 보면 온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거미를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우연히 한 편의 시를 읽은 후부터 거미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가 거미를 사랑하게 만든 시는 바로 백석의 <수라> 이다.  

   

수라(修羅)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희한하게 우리 음악실 복도에도 두 마리의 거미가 있었다. 한 마리를 옮겨주고 나니 나머지 한 마리는 구석 어디론가 숨어버려 미처 옮겨주지 못했다. 내가 그들 사이를 수라(아수라 할 때 수라修羅)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마음이 쓰인다.


  근 18년간 거미를 끔찍하게도 싫어했는데, 이 시를 만난 뒤로는 별안간 거미를 보는 눈빛에 애틋함과 사랑이 서리게 되었다. 그렇게 거미를 사랑하게 된 지 8년이 되어간다. 참 신기하다. 시 한편에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욕심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혹여 거미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누군가가 나로 인해 거미를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이다.

  누군가 나로 인해 전혀 새로운 것을, 또 생각지도 못했던 어떤 것을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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