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의 값
저마다의 인생에는 모두 저마다의 숙제가 있다. 가난과 함께 자란 사람이라면 가난한 환경이, 불편한 몸을 가졌다면 신체 조건이 각자의 인생 속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 나에게도 영원히 안고 갈 인생의 숙제가 있다. 부모님의 이혼, 엄마의 죽음 정도가 있다. 대게 하나의 큰 숙제는 자잘한 숙제를 낳는 법이다. 가난은 또 가난을 낳고, 자식의 자식까지 가난 속에 살게 될 가능성이 큰 것처럼. 엄마 아빠의 이혼은 어릴 적 나를 약간은 어둡게 하기도 했고, 엄마를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도 했고, 결혼을 앞둔 나를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엄마의 죽음 또한 그렇다. 나는 아직도 엄마 꿈을 꿀 때면 무슨 기분인지 설명하기 힘든 상태로 아침을 맞는다. 슬프지만 어찌할 방도가 없다. 아픔을 털어내듯 잠을 깨우며 이것 또한 내 인생의 영원한 숙제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숙제는 늘어난다. 사랑했던 누군가가 떠나가기도 하고, 책임져야 할 무언가가 늘어나기도 하니까. 숙제마다 뾰족한 해결 방법이 있으면 다행인데,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그냥 받아들이는 것, 묵묵히 버티는 것,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것이 답이다. 그렇게 매일 주어지는 인생의 숙제를 매일 버티거나 받아들이며 살아가다 보면 어떤 날은 버겁기도 하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날은 걷다가도 눈이 감기게 피곤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애버랜드 폐장 시간까지 놀아도 끄떡이 없기도 하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에도 가슴 한구석에는 다들 저마다의 인생의 숙제가 잠잠히 자리하고 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엄마가 죽은 지 3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엄마 꿈을 꾼다. 일주일에 3번 이상 꾸는 것 같다. 체감상 거의 매일이다. 오늘도 어김없었다. 누군가는 보고 싶은 얼굴을 꿈에서라도 볼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 꿈이 반갑기보단 괴롭다. 꿈에서는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오늘 꿈은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엄마를 떠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뒤돌아서 가는 엄마를 계속 부르고 손을 흔들다 잠에서 깼다. 엄마 꿈을 꾸는 날 아침이면 알 수 없는 그 기분을 털어내려고 빨리 씻으러 들어가거나 핸드폰을 만진다.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값이자 오늘치 숙제려니 하며 출근 준비를 한다.
세상에서 내 숙제가 제일 거대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오직 나만이 이 버거운 인생을 등에 이고 낑낑거리며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치 숙제를 해결하며 삶의 값을 치르고 있는지를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때, 나의 인생도 무르익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