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욕심처럼 인생을 따라다닌다. ‘이것만 해결되면 걱정이 없겠네.’ 하지만 ‘이것’이 해결되고 나면 이내 새로운 걱정거리를 찾아 또다시 걱정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때그때 마주하는 나의 걱정들은 어느 누구의 걱정거리보다 큰 것 같고 또 심각한 것 같다. 현재의 걱정이 직전의 걱정거리보다 훨씬 사소하더라도 언제나 현재의 걱정 주제가 가장 심각한 것이 된다.
나는 이것을 걱정 총량의 법칙이라 부르기로 했다. 인간은 사냥과 수렵의 삶을 살아온 지 1만 2천년이 넘었고, 경계와 의심을 늦추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환경에 살았기에 유전적, 본능적으로 걱정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현대 문명 속 인간의 삶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지금은 밤 11시 59분이라고 한다. 23시간 59분을 ‘내가 갑자기 들짐승의 공격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 속에 살았던 인간이라면, 걱정은 당연히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것임을 받아 들이는게 어렵지는 않다.
인류는 지난 시간 동안 살아남기 위해 걱정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무엇을 위해 걱정하는가? 걱정을 통해 무엇이 나아지는가? 나는 때때로 나를 침식하는 걱정거리들을 새롭게 바라보곤 한다. ‘걱정한다고 해결 되는가?’ 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네/아니오’ 를 스스로 답한다. 대부분 ‘아니오.’ 주로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 없는 문제. 그러니까 타인의 마음에 달린 문제, 나의 힘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걱정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걱정하는 마음을 접어두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유전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은 마음으로 언제나 걱정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지만, 현대 시민으로서 조금은 가볍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