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몇 년을 읽고 싶었던 책이 있었는데 못 읽었던 <자기 앞의 생>을 드디어 읽었다. 고등학교 때 같은 기숙사에서 만나 이제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엄마가 죽던 2020년 7월은 꽤나 서늘했다. 최장기간 장마로 기록을 세운 해였다. 비가 왔던 탓도 있겠지만 세상이 나에게 가장 차가웠던 해였기에 나는 유달리 그 해 여름을 추워했다. 언제나 검은색 바람막이를 겹쳐 입었다. 병원에서부터 장례식, 엄마를 묻으러 가던 선산에까지. 지금도 옷장에 걸려 있는 검은색 바람막이를 나는 잘 입고 다닌다. 등산갈 때, 잠깐 집 앞에 나갈 때. 그럴 때면 나는 2020년에 이 옷을 매일 같이 입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아주 가끔씩만 떠올릴 뿐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모모’의 입장에서 서술된 소설이다. 모모는 창녀의 자식으로 태어나 창녀들의 자식을 돌보는 보모 ‘로자 아주머니’의 돌봄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하지만 모모가 열 네 살이 되어갈 무렵 로자 아주머니는 늙고 노쇠하여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모모는 그 곁을 지키며 생(生)이 로자 아주머니를 파괴하여, 이렇게 늙고 죽어가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p. 148
열다섯 살 때의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일까?
하지만 동시에 생(生)이 있었기에 로자 아주머니가 탄생했고 또 모모가 탄생했고 그들이 만나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고도 말한다.
모두들 자기 앞의 생을 끌어안고 산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들’을 겪어낸 어린 날들은 곧 지나가고 각자 어른이 된다. 여름이 추울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은 늦게 알았어도 됐을테지만. 그때의 바람막이를 여전히 잘 입고 다니는 나에게, 자기 앞의 생(生)을 겪어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