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금 물러질 필요가 있다. 말할 수 있지만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치밀어 오르는 대꾸를 혓바닥 뒤로 눌러 삼키는 법을 배워야한다. 어쩔 때는 싸웠다고 뒤도 안돌아보고 쌩깔 수 있는 고등학생이 부럽다. 어른의 삶은 참 쓴것이었다. 싫어하는 마음은 꽁꽁 숨겼다가 집에서나 풀어 젖혀야 한다. 찾아가서 ‘너 왜 나 싫어해?’하고 물을 수도 없다. 차라리 툭 까놓고 이야기라도 하고싶은데, 그런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말할 힘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을 ‘말’로 하는 것은 참는다지만, 글로 쓰는 것도 참아야할까? 모르겠다. 그건 다음번에 참아보겠다.
언제나 튀어나오는 말들을 삼키지 못했던 나는 지속적으로 주변에 싸움이 일었다. 일단 부딪혀 싸워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대학시절, 내가 속한 과에는 일명 ‘똥군기’가 꽤나 유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연습실 청소는 항상 1학년이 맡아서 해야했는데, 보란듯이 과자 껍질을, 먹다 남은 초콜릿을 두고 가는 선배가 참 싫었다. 하고픈 말을 참지 못하고 연습실 청소를 시켰던 과 선배에게 대들었다. 그 선배와 친했던 다른 선배는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기 시작했다. 인사를 안받아? 나도 안한다.하는 마음으로 좁은 복도에서 지나쳐도 보란듯이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선배의 편을 들기위해 내가 발표를 할 때를 기다렸다가 일부러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던 선배도 생겨났다. 내 발표가 끝나고 대놓고 야유를 하길래 그 선배에게 찾아가 그러는 이유가 뭔지 물었다. 복도에 지나가는 그 남자 선배를 붙잡고 ‘저한테 왜 그러세요?’물었더니 갑자기 당황을 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 날 이후로 그 오빠는 그러기를 멈췄다. 결론은 내가 이긴 것처럼 보이긴 하나 그 과정이 매우 고되긴 고되었다.
10년정도 흘러 스물 아홉 직장인이 되었다. 부서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을 7개월동안 두고 보다 참지 못한 어느 날, 그보다 더 상사인 사람을 찾아가 그동안의 일례를 늘어놓았다. 당연히 내가 맞는 말을 하니까,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 ‘편’까지는 아니더라도 해결을 위한 제스쳐는 취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더 높은 상사에게 자신의 상사의 흉을 보는 것은 좋지 못 한 행위이니, 자중하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제가 해드릴 수 있는게 없어요.’
하고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 올랐다. 그동안은 고되긴 했어도 내가 이긴 것처럼 잘 흘러갔는데, 이젠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몇 번 더 부딪혀보지 않아도 느낌이 왔다. 이건 내가 이길 싸움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맞다고 생각한 것’에서부터 불신의 싹이 텄다. 어쩌면 내가 ‘맞다고 생각한 것’이 애초에 ‘맞지도 않는 것’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뭐가 문제일까,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나의 말과 상사의 말은 모두 허공을 떠돌 뿐 서로에게 흡수된 부분이라곤 없다. 상대는 조언이랍시고 한 말같은데, 재수만 없었지 전혀 조언으로 다가오지가 않았다. 내 딴엔 성찰과 혁신이 섞인 뜀박질이었는데 그 벽이 어찌나 높았던지전혀 닿지를 않았다. 이 경우에는 승리감도 패배감도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무익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은 지키되 타인의 조언에 귀기울일 줄 알아야 독불장군의 길을 피할 수 있다. 영양가있는 조언을 먹고 자라기 위해서는 먼저 조언의 질을 잘 구분할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한다. 주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되 나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아야한다. 하, 이 얼마나 모순되고 어려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