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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선풍기

by 비유리

엄마의 짧은 병원 생활을 떠올리게하는 물건들이 있다. 첫번째는 일회용 카페 컵에 담긴 수박이다. 엄마가 중환자실로 올라가기 전에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는데 유일하게 수박이 먹고싶다고 했었다. 편의점에 있는 밀봉해서 파는 그런 수박 말고, 진짜 수박. 갓 갈라 물기가 가득하고 시원한 그런 수박이 먹고싶다고 했었다. 나는 당시 작은 원룸에 자취를 하고 있을때라 집에 그 큰 수박을 갈라 넣어놓을 냉장고조차 없었다.

그 때 내가 살던 곳은 노량진이었는데, 그곳에는 여름에 수박을 먹지 못하는 자취생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을 노려 노량진역 바로 앞에는 길에서 수박을 잘라 컵에 넣어 파는 아저씨가 계셨다. 노상에 위치한 포장마차같은 구색이지만 청결하고 맛이 있는 수박을 쓰는 가게라 나름 입소문이 났던 곳이었다. 나는 그 곳을 떠올려 엄마에게 줄 수박을 세 컵 샀다. (그 중 두 컵은 아예 뜯지도 못하고 엄마는 중환자실로 갔더랬다. )

엄마는 내가 사온 수박을 보고 바로 이런 수박이 먹고싶었다며 좋아했다. 엄마가 원하는 수박을 사왔다는 기대에 차 개봉한 첫번째 수박 컵. 엄마는 그 첫번째 조각을 딱 한 입 먹고 갑자기 차가운 것이 들어와서 그런지 속이 불편하다며 전자레인지에 살짝 데워달라고 했다. 수박을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먹기도 하나? 엄마가 진짜로 전자레인지에 데운 기이한 수박이 먹고싶었던 것인지, 노량진에서부터 그것을 사온 나를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으나, 수박을 먹어보겠다고 기울인 그 노력은 한 조각도 채 채우지 못한채로 끝이 났다.


두번째는 탁상용 선풍기다. 손에 들고 쐬는 선풍기 말고, 탁상에 놓고 쓰는 꽤 커다란 사무실용 선풍기다. 처음에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고 병원 편의점에 갔을 때 다른 편의점에서는 웬만해서 볼 수 없는 그런 선풍기를 여기서 왜 팔지?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병원 편의점에는 다른 편의점에서 볼 수 없는 각종 입원용 물건들을 많이 판다. 예시로 빨대가 달린 컵, 성인용 기저귀, 비데용 물티슈같은 것들이 있다. 처음엔 몰랐으나 선풍기도 그 중 하나였다.

엄마가 입원을 했을 때는 코로나가 막 창궐한 2020년의 여름이었다. 다인실의 각 침대는 모두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될 수 있도록 커튼을 친 채로 보호자까지 무조건 마스크를 끼고 생활해야만 했다. 덥고 답답했다. 암성 통증으로 몸에 열감이 왔다갔다 했던 엄마는 그 답답함과 더위를 더욱 참지 못했다. 작은 선풍기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제야 편의점에 왜 탁상용 선풍기가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선풍기를 사왔더니 엄마는 이제 좀 살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그 선풍기도 며칠 쓰지 못했다. 심박이 잡히지 않아 갑작스레 중환자실로 올라가게 되면서 급하게 일반실을 정리하고 버스를 타고 노량진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내 손에는 수박 세 컵과 휴대용 선풍기가 들려있었다. 그것들은 내게 짐만 되었다.


의식이 없이 가만히 누워있는 엄마의 심박수가 150대를 찍었을 때 의사는 이를 설명하길 성인이 100미터를 전력질주하고 난 뒤의 심박과 같다고 말했다. 몸 어딘가에서 계속해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고, 심장이 이를 매꿔보려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고 있는거라고 했다. 70대에 이 속도로 심장이 뛰고 있으면 한나절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수 있는 심박이란다. 엄마의 심장은 젊어서 꽤 오래 버티는거라고. 피가 나는 곳만 막으면 심박이 정상으로 돌아올거라고 했다. 하지만 끝끝내 어디에서 피가 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그 덩어리에서 피가 맺히고 지속적으로 출혈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모든 장기가 동일한 속도로 노화되고 또 병들지 않는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췌장은 병들어 엄마의 의식을 앗아갔으나 심장은 싱싱해 그 혼수상태를 신기할 만큼 길게 잡아 끌고 있었다. 엄마의 가슴팍에 귀를 갖다대 보면 심장은 안타까울만큼 열심히 제 할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아직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정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신기하게도 나는 이 글을 쓰며 울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내 인생을 처참하게 만들었다 느낄 때가 있었으나 더이상 울게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징조려니 한다. 남편이 캠핑을 좋아해서 우리 집 팬트리 한가운데에는 휴대용 선풍기가 떡하니 얹혀있다. 엄마가 병원에서 쓰던 그런 것과 완전히 똑같다. 그 선풍기를 볼 때마다 단 한번도 빠짐없이 엄마를 떠올린다. 그 때도 울지는 않는다.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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