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스』를 보고.
★★★★
경중의 철학에 대한 탐미적 분석.
무거움은 무엇이고 또 가벼움은 무엇인가?
무거움은 책임이다. 니체가 말하듯 세상이 영원히 회귀한다면, 부처가 말하듯 생명이 윤회의 굴레에 묶여 있다면, 예수가 말하듯 현세에 따라 내세의 행선지가 정해진다면 모든 선택에는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 무거움은 의미, 필연, 영원 따위의 숭고한 가치다. 무거움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동시에 자유를 박탈한다.
가벼움은 본질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며, 윤회나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는 그저 예견된 종말을 향해 천천히 달려갈 뿐이다. 끝이 정해진 이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네 인생은 조금의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인생의 본질적 가벼움을 받아들인 인간은 자유를 얻는다.
모든 무거운 이는 가벼움의 공허(그리고 공허의 가벼움)로 침잠하고자 하는 욕구, 즉 현기증을 느낀다. 가벼움을 마주한 인간은 무거움의 속박을 벗어던지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 그는 모든 의무와 책임에서 도피해 가벼움이 허락하는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현기증은 중력과도 같아서 자연스러우며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자의식은 가벼움으로의 추락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존재의 본질적 더러움을 마주할 용기가 없다. 무거움을 지향하는 인간은 그 이면에 사실 가벼움이 있음을 애써 무시한다. 인생은 일회성이고, 그 의미를 찾아 부르짖어봤자 세상은 답하지 않는다. 현세의 고통을 보상해 줄 내세는 실존치 않는다. 삶은 한 번의 죽음으로써 끝이다.
인간은 자의식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가벼움을 키치로 가린다. 키치(Kitsch)는 추함을 숨기고자 하는 욕망이다. 선악과를 베어 물고 부끄러움을 깨우친 인간은 본능적으로 더러움을 숨기려 한다. 예수의 죽음이 그렇다. 모든 인간은 죽을 때 괄약근에 힘이 풀리며 배설물을 떨어뜨린다. 성인의 숭고한 죽음도 파리가 꼬이는 더러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필두로 예수를 그린 작품에서 그의 죽음을 진실되게 묘사하는 경우는 찾을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은 무거워야 하기 때문이다.
무거움은 의식의 부작용이다. 자의식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 추함이 내비칠까 두려워 자연스러운 가벼움에 몸을 맡기지 못한다. 춤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를 상상해 보라. 그는 거울로 자신을 바라보며 동작이 틀리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 탓에 그의 움직임은 더욱 경직된다. 무거운 것은 우아하지 못하다(물리적으로도, 관념적으로도).
의식이 없는 자는 키치에서 자유로우며, 따라서 가벼운 이들 중 가장 가볍다. 망자, 짐승, 그리고 인형이 그러하다. 의식 없이 외력에 충성하는 마리오네트는 더없이 우아하다. 인형에게는 스스로를 인식할 의식이 없다. 그는 그저 들어 올리는 장력과 끌어내리는 중력에 몸을 맡긴다. 그의 움직임은 가장 자연스럽기에 가장 우아하다.
비로소 우리는 바토가 인형에게 사죄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의식이 없기에 키치를 범하지 않는 인형은 결백(Innocence)하다. 그러나 한 인간이 인형에게 복제된 전뇌를 탑재함으로써 의식을 불어넣었다. 이제 인형은 가볍지도, 우아하지도, 결백하지도 않다. 바토는 가벼운 존재를 무거움의 영역으로 끌어내린 것을 사죄한다. 동시에 그는 인형의 나신을 외투로 가려주며 키치를 범한다.
무거운 존재는 결코 우아할 수 없는가? 의식의 소거만이 우아함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가? 다행히 그렇지는 않다. 예술가들은 수없이 연습을 반복하여 동작을 무의식이 관장하는 육체에 각인시킨다. 숙련된 기술에 고도의 집중이 더해지면 두뇌는 일시적으로 변화한다. 비판적 사고와 자기 검열을 담당하는 등측전전두엽의 활동이 저하된다. 시간을 인식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억제되어 영원을 찰나로, 순간을 억겁으로 착각한다. 보상과 관련된 호르몬이 동시에 분비되며 극도의 행복감을 느낀다. 서양 뇌과학은 이를 몰입 상태(Flow State)라 부르고, 동양철학은 이를 무아지경이라 부른다.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자아는 사라지고 동작만이 남는다. 스스로를 속박하는 자의식을 떨쳐내고 무의식이 해방된다. 육체가 저절로 움직이며 극도로 우아한 동작을 그려낸다. 진정한 가벼움을 몸에 두르고 의식의 한계 위로 비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