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시간선에 박제한 폴라로이드

『엘리펀트』 비평.

by 영화보는 정씨

사진은 영화에 비해 무엇이 부재한가. 사진에는 시간이 없다. 시간은 오로지 변화로만 감각되므로 시간축의 단면을 필름에 박제한 사진에는 시간에 관한 정보가 부재하다. 시간이 부재하므로 서사 또한 없다. 영화는 그저 사진의 나열이다.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활동사진은 일련의 사진들을 빠르게 재생하는 기술일 뿐이다. 서사는 이미지의 변화에서 기인하기에 사진에는 부재하다. 서사가 없으니 감정도 없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등장인물의 감정을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없으니 서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끼도록 하는 방법을 택한다. 사진에는 서사가 없으므로 보는 이는 피사체의 표정으로 감정을 짐작만 할 뿐, 그것에 진정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림 같은 영화고 <버닝>이 소설 같은 영화라면 <엘리펀트>는 사진 같은 영화다. 이 작품에는 사진과 같이 시간, 서사,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거스 밴 샌트 감독은 영화의 화면비를 통해 이를 확실시한다. <엘리펀트>의 화면비인 1.33:1은 1910~30년대까지 사용된 무성 영화의 표준이다. 백 년 전 유행이 지난 낡은 화면비를 굳이 택한 것은 그것이 필름 카메라의 화면비이기 때문이다. 내용에 시간과 서사, 감정이 부재하고 그 형식마저 사진을 닮은 이 영화는 차라리 사진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영화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세 요소를 소거함으로써 영화는 무엇을 달성하는가?


시간의 소거

<엘리펀트>는 34명의 사상자를 낳은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 사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영화는 사건의 당일 희생당하는 학생들의 일상을 그들의 이름을 딴 챕터로 하나하나 소개한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를 챙기는 존, 사진을 찍으며 전시를 준비하는 엘리어스, 도서관에서 일하는 미셸, 퀴어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아카디아, 그림 같은 커플 네이선과 캐리, 항상 붙어 다니는 브리트니와 조던 그리고 니콜, 겁먹지 않고 남을 돕는 베니. 이야기가 전개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같은 시간대의 공간적 분할일 뿐이다. 각기 다른 공간에서 시작된 아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의 시공간에 수렴한다. 총격이 시작되는 한낮의 복도.


영화가 사진이라면 카메라가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며 아이들의 행적을 되짚는 것은 필름을 인화하는 과정이라 보아도 좋다. 두 총격범이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직전 카메라는 돌연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잡는다. 흥미로운 점은 이 쇼트가 구름이 검은색으로 보이도록 명암이 반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반면 두 총격범이 모든 살인을 끝마치고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의 배경에는 맑은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다. 두 쇼트의 대비는 네거티브 필름의 현상現像을 연상시킨다. 두 총격범이 방아쇠를 당기자 아이들의 시간은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는 현상을 마친 필름처럼 사진에 박제된다.


영화는 사건을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듯 강박적으로 시간을 되돌리지만 이미 지나간 역사이기에 아이들은 사건의 현장으로 여지없이 걸어간다. 카메라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뒤통수를 쫓는 것뿐이다. 그래서인지 카메라는 그들의 걸음걸이를 유독 긴 롱테이크로 담아낸다. 흘러간 시간을 바꿀 수 없다면 최선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담아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일 테다. 그것은 일종의 추모다. 롱테이크 속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날 목격해 줘(witness me)."


서사의 소거

영화의 말미에 등장하는 두 소년에 주목하자. 우선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둔 백인 소년 존이다. 학교 바깥에서 총격범들을 마주친 그는 차로 뛰어가지만, 아버지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뒤다. 클리셰에 익숙한 우리는 그가 아버지를 찾으러 학교에 다시 들어갔다 총격에 당할 것을 예상한다. 그러나 그는 잠시 후 아버지와 안전하게 재회한다. 반면 흑인 소년 베니는 오히려 총격범에게 다가간다. 그는 교장과 말다툼을 벌이는 총격범 알렉스의 등 뒤로 숨을 죽이며 접근한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베니가 총격범을 제압하리라 짐작하지만, 그는 뒤를 돌아본 알렉스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무참히 살해당한다.


<엘리펀트>는 클리셰를 파괴함으로써 영웅 서사를 소거한다. 영웅 서사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 중 가장 오래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사천 년 전,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로부터 영웅의 발자취는 시작되었다. 아킬레우스와 헤라클레스를 거쳐 모세로 발전하며 기원후의 문이 열렸다. 그 계보는 베오울프와 장 발장을 거쳐 현대의 한 마법사 소년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특별한 자질을 지녔으며 고난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에 발명된 기법이 아직까지 널리 사용되는 이유는 그 효과성 때문이다. 관객은 영웅의 시련에 슬퍼하고 성취에 기뻐하며 극에 몰입한다. 그가 마침내 결말에 도달했을 때 관객은 마치 자신이 영웅이 된 것 마냥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영웅의 후광은 너무 밝아 뒤에 있는 이들을 가린다. 전장에서 스러진 수많은 잡졸들의 목숨 역시 영웅의 목숨에 비해 조금도 가볍지 않다. 한데 관객은 영웅의 발자취를 뒤쫓으면서 '엑스트라'들의 삶과 죽음은 잊는다. 영웅 서사에 길들여진 관객은 두 소년이 영웅적—가족을 구하거나 범인을 제압하는— 행동을 벌일 것으로 예상한다. 만약 그리하였다면 관객은 그들의 서사에 공감해 눈물을 흘리고서는 앞서 죽어간 다른 이들을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펀트>에는 영웅이 없으므로 죄 없이 죽어간 모든 이들이 기억된다. 감독은 클리셰를 비틂으로써 현실은 영화가 아님을 날카롭게 상기시킨다. 현실에는 주인공도 엑스트라도 없다. 서사 없이도 죽음은 비극적이다.


감정의 소거

'가해자가 된 피해자' 서사는 현실에서도, 창작에서도 흔하다. 많은 총기난사 사건의 동기는 학교폭력이다. 불과 2년 전 한국에서도 학교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총기 소유가 합법인 미국은 오죽하랴. 가해자의 불우한 과거가 범행의 동기가 되는 경우는 흔하고, 이는 가끔 동정 및 참작의 사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의 사건을 스크린 위로 옮길 때 문제가 발생한다. 가해자의 서사를 지나치게 묘사할 경우 피해자를 소외하고 가해자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반대로 그러지 않을 경우 영화는 개연성을 잃는다. 때문에 살인의 동기를 설명하면서도 정당화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엘리펀트>는 감정을 소거함으로써 이를 달성한다. 살인자 알렉스 역시 학교폭력의 피해자다. 그러나 영화는 괴롭힘 당하는 알렉스의 감정을 묘사하는 대신 마찬가지로 소외되었지만 자신의 일에 담담히 임하는 미셸을 조명함으로써 폭력에 면죄부를 부여하지 않는다. 총격을 가하는 장면 역시 울분이나 쾌감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는 대신 1인칭 슈터(FPS) 게임의 화면처럼 표현해 살인을 놀이로 취급하는 그의 잔혹함을 강조한다. 그가 교장에게 범행 동기를 설명하는 장면에서 포커스는 곧 피해자가 될 베니에게 맞춰져 있다. 알렉스는 그저 블러 처리된 배경에서 잡음이 섞인 음성으로 알아듣기 힘든 말을 늘어놓을 뿐이다.


감정이 부재한 연출을 통해 <엘리펀트>는 동기가 존재하더라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증명한다. 영화는 살인의 동기를 제시하지만 가해자의 감정은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때문에 관객은 가해자에게 공감하는 대신 그가 저지른 범행의 잔혹함을 날것 그대로 받아들인다.


방 안의 코끼리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시간과 서사, 감정을 소거함으로써 영화는 무엇을 달성하는가? 그것은 바로 다정함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평면적이다 못해 황폐한 이 영화가 사실은 다정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는 감정을 소거함으로써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부여하지 않는다. 서사를 소거함으로써 목숨의 무게를 달리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소거함으로써 멈춰버린 아이들의 이야기를 스크린 속에 담는다. <엘리펀트>는 그 자체로 피해자들의 영정사진이 된 셈이다. 영화를 영화로 만드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면서까지 피해자를 예우하는 이 작품은 콜럼바인 고교 총기난사사건에 대한 가장 영화적인 추모라 하겠다.


이제 마지막 물음만이 남았다. 왜 엘리펀트인가? 당연히 영화에 코끼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답을 나는 한 관용구에서 찾는다.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는 누구나 알면서도 언급을 꺼리는 사안을 의미한다. 미국의 총기법이 바로 그것이다. 극 중 총격범들은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총기를 택배로 주문한다. 배송 기사는 택배를 받는 이들이 학생임을 알면서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총기를 건네준다. 그들이 총기를 구할 수 없었다면 총기난사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엘리펀트>는 스스로 영화관 안의 코끼리가 되면서 빈약한 총기 규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그러나 <엘리펀트>가 개봉한 지 23년이 지났는데도 총기법은 그대로다. 미국에서는 매년 4만 명 이상이 총기 사고로 사망한다. 방 안의 코끼리는 사라지기는커녕 군수업체의 로비를 먹고 제 몸집을 곱절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