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도 행복하다
“자! 일어나세요. 도착했어요.”
버스 운전사가 돌아다니면서 자고 있던 승객들을 깨웠다. 불빛 한 점 없어 아직도 까만 밤인지 새벽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가까스로 눈을 비벼 뜨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3시다. ‘보팔’역 앞에서 정차한다는 버스는 대체 나를 어디에 내려 준 걸까? 역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도를 여행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인도 버스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붓었다. 이제 적응할 법도 한데 쉽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중세의 삶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시 ‘만두’를 가기 위해서였다. 만두는 보팔에서 인도르까지 기차로 5시간, 인도르에서 만두까지 버스로 또 5시간을 가야 하는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보팔에서 만두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인터넷이 없는 세상, 오직 서양 책 한 권에 의지하며 다녔지만, 가끔 뜻하지 않게 반가운 소식을 접하기도 했다. 다행히 만두행 버스가 있었고 다음 날 출발하는 버스로 예약했다.
한시라도 빨리 만두에 가고픈 마음에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버스회사로 갔다. 하지만 그곳 사장은 손님이 없어 하루 더 기다려야 한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다른 회사 버스가 있는지 물었는데 만두행 버스는 오직 여기뿐이라며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출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노프라블럼(No problem)’이라고 말했지만, 무엇인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역시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버스가 고장났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삼 일째 되던 날도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이번만큼은 벼르고 왔던 터라 한국말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 격앙된 내 목소리에 놀랐는지, 바로 다른 회사 버스가 간다며 나를 안내했다. 그동안 유일무이 버스라더니 거짓말이었다. 결국 ‘디럭스 버스’ 값으로 한 단계 낮은 ‘세미 디럭스 버스’에 올라탔다.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10시간을 갈아타지 않고 한번에 간다는 것은 인도 여행에서 큰 호사였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멈췄다. 알아보니 앞바퀴가 펑크났다는 것이다. 현지인들은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서 보자기를 폈다. 어느 누구도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화가 바르르 치밀어 올랐다. 환불해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허허벌판 한복판이라 딱히 어디를 갈 수도 없었지만, 걸어서라도 가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요구했다. 그런데 그게 먹혔다. 갑자기 시내버스가 있다면서 버스 운전사가 나를 데리고 버스 타는 곳까지 안내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정말로 버스가 왔다. ‘아! 노프라블럼(No problem)이구나!’ 그 버스는 다름 아닌 경북 ‘군위’까지 가는 시내버스였다. 차 지붕의 반은 돌돌 말아져 없었지만 여기저기 한글 안내판을 보니 이상하게 안도감이 일었다. 폐차 직전의 한국 시내버스를 사서, 두 명 자리를 세 명이 앉을 수 있게 내부는 변경되어 있었다. 나는 현지인과 꼭 붙어 6시간을 가서야 만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힘들게 만두에 온 터여서, 떠날 때는 서양인 여행자들과 동행했다. ‘오는 길은 달라도 가는 길은 같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도 버스는 여행자들을 인도르에 내려놓았고, 도착지점에 다른 버스가 기다려 이들 대부분을 보팔까지 이동시켰다. 이른 새벽, 나를 태운 버스는 다시 보팔에 도착했다. 역 앞에서 내려준다고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역은 보이지 않았다. 릭샤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짐이 무거웠던 터라 사이클릭샤보다는 오토릭샤가 좋겠다 싶었다. 오토릭샤꾼 중에 가장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넸다.
“역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아주 멀어요.”
“요금은 얼마예요?”
“그냥 10루피(300원)만 주세요.”
“멀다면서요? 정말 그 돈만 주면 되나요?”
“그럼요.”
당시 10루피(300원)의 가치는 바나나 12개를 살 수 있었고, 오토릭샤로 치면 15분 정도 가는 거리였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부르는 것이 인도였다. 정직한 릭샤 할아버지가 고마웠다. 300원이 큰돈은 아니었으나 인도 여행할 때 속이려고 하는 인도인 때문에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물론 순수한 인도인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외국인을 ‘봉’으로 알았다. 현지 요금의 10배 정도 부르는 것은 예사였고, 외국인이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로 성추행을 서슴지 않았다. 혹시나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어, 쉽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여행 막바지라 짐도, 마음도 다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야간 버스로 지친 몸을 오토릭샤에 실었다. 냉한 새벽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할아버지에게 빨리 출발하자고 재촉했다. 오토릭샤에 온몸을 맡기려고 하는 순간, 그때였다. 1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덜커덩’ 오토릭샤가 멈췄다. ‘뭐야 또 고장인가?’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손님, 역에 도착했어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할아버지도 멋쩍으셨는지 ‘헤헤’하시면서 웃으셨다. 좀처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차역 입구에서 대합실까지 택시를 타고 들어간 셈이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대합실에만 불이 켜져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런데 참 신기했다. 이 허탈한 웃음이 그동안 얼었던 몸과 마음을 녹여주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 나쁜 일을 겪는 것이 낫고, 가끔 속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인도인을 믿지 못해 속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하며 여행했다. 하지만 속이려고 작정하는 그들에게 외국인인 나는 무방비 상태로 당했다. 기분이 나빴고 화도 치밀었다. 그로 인해 나의 몸과 마음은 지쳐갔다. 이곳에서 두 달이 되어가는 지금, 이제는 더 이상 속지 않겠지 했는데 또 이렇게 당했다. 그런데 뭘까? 웃음이 나왔다. 어이없어 나오는 허탈한 웃음이라기보다는 나의 경직되었던 마음의 해제에서 오는 여유로운 웃음이랄까? 속아도 행복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도 나는 이곳저곳 여행을 다닌다. 이제는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알면서도 속아주는 여유도 부린다. 늦은 새벽 주무시지도 못하고 일하는 릭샤 할아버지에게 10루피만 준 것이 오히려 미안했다. 그때, 10루피는 평생 나에게 여행의 의미를 알려 준 값진 보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