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덟_8
무화과나무는 화선과 태어났다.
나는 보령의 어느 암나무에서 종자로 떨어졌고 작은 나무로 시작했다. 그 때 시장에는 나 말고도 호랑가시나무, 배롱나무같은 예쁜 나무들이 있었다. 호랑가시나무는 아직 잎순이 부드러워보였고, 배롱나무는 작지만 빨간 꽃들에 둘러쌓여있었다. 나는 민둥한 나무에 불과했다. 구니가 선택한 것은 민망하게도 나였다.
화선이 나온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신문지에 쌓인 뿌리에서 흙이 자꾸 떨어졌다. 구니 옷이 더러워졌고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배롱나무가 성격도 좋아보이던데 왜 무화과나무인 나를 선택했을까. 구니가 나를 심다가 화선이 울자 금세 달려갔다. 고작 다섯 발자국에 화선을 안아 달래는 구니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사랑.
구니는 앳되지 않은 얼굴에 매일 근심이 가득했다. 오늘의 끼니를 걱정하는지 모를 얼굴로 작은 바가지를 들고 얼마 없는 음식물을 거름주었다. 가끔은 작은 화선이 안겨 나왔고, 화선이 옹알거리자 구니가 손을 뻗어 내 가지를 만져보게 했다. 내 가지에 가시가 없어 다행이다 생각한 순간이었다.
열매를 더 달콤하게 만들어줘야지. 화선은 오빠들이 먹다 버린 과자봉지들을 빨아먹으며 마당을 돌아다녔다. 그 무렵 구니는 내가 짓는 그늘이 없이도 어두운 표정을 갖고 있었다.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다. 화선보다 조금 커버린 나는 아직 화선이 손바닥만한 열매, 그것도 살짝 붉은 열매만 만들 수 있었다. 잎이 초록이면 열매는 붉어야 하는데, 아직 잎파리도 화선이 얼굴을 가리지 못하니. 얼른 큰 나무가 되고싶었다.
화선이 울며 걸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머리는 길어졌는데 키는 그닥 자라지 않은 화선이었다. 구니는 밤이 어두울 때 들어왔고, 화선은 집에서도 혼자였다. 사실 구니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나를 넘어 다른 것을 보다가 화선이 나오면 슬쩍 자리를 피했다. 나는 가지를 흔들어 화선을 반겼는데 아마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구니만 눈으로 좇으며 상처받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나는 봤는데 말이다.
화선이 모처럼 웃으며 집에 들어온 날이었다.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화선은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거다. 나무는 웃을 수 없지만 나는 웃었다. 화선이 보여준 미소를 닮아있었을거다. 나는 화선을 사랑하니까. 아버지까지 들어온 저녁에, 방 안에서 큰 소리가 왕왕 울렸다. 구니의 목소리가 태반이었다. 시인이 무엇인진 몰라도 구니가 그것을 싫어하는구나 대번에 알 수 있었다. 화선이 집에서 나와 개가 다 빠진 우리 옆에 앉아 울었다. 내 옆에서 울었다면 그늘이라도 만들어 줬을텐데. 하지만 밤엔 그늘이 소용없다.
화선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오빠들은 안보인지 오래여서 당연한 일, 화선은 적어도 두 번은 들렀는데. 화선이 보고싶다. 이젠 더 큰 잎으로 등을 토닥여줄 수 있는데. 이제 집도 조용하고 구니가 쓸쓸해보이기까지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보다 달콤한 열매를 맺어도 먹는 사람이 없다. 화선과 구니는 나를 잊었는가보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다. 화선을 닮은 조그만 아가가 집에 놀러왔다. 이름이 여덟인 아이. 나는 커다란 나무가 되었고, 나를 보려 하늘을 볼 때 아이 몸만한 그늘을 지어줄 수 있다. 나는 여덟을 위해 이리도 커졌구나. 나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 나는 구니, 화선, 여덟을 사랑한다. 열매를 더 달콤하게 만들어야지. 여덟에게 가장 맛있는 열매를 선물해야지.
구니가 내항동을 떠난다. 혼자 내항동 집에 살던 구니가 구급차에 실려갔던 그날 이후, 여덟이 자기 닮은 작은 차에 이것저것 싣고는 내항동을 떠났다. 나는 구니가 가끔 음식물을 거름주지 않아도 견딜 수 있었다. 화선이 나를 매정하게 쳐다봐도 슬픔을 참을 수 있었다. 여덟이 나를 못본채 지나가도 괜찮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이곳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없는 내항을, 나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 달콤한 열매를 계속해서 만들면 그들이 돌아올까.
몸이 말라간다. 작은 여덟이 나를 가득 안아주면 한참이 남던 몸이 점점 가늘어졌다. 그래도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더욱 달아졌다. 수분을 끌어올려 열매에 꿀을 채운다. 이것은 구니를 위한 열매, 이것은 화선을 위한 열매, 이것은 여덟을 위한 열매. 가장 맛있는 열매를 하나씩 정해놓곤 미소짓는다. 예전의 화선의 웃음과 여전히 닮았을까.
화선이 돌아왔다. 손에는 처음보는 가방이다. 나는 말라버렸지만 화선의 몫으로 남겨둔 무화과는 아직 통통하다. 나는 점점 기대한다.
'어서 따봐. 맛을 보고 다시 한번만 그 웃음을 보여주라.'
화선이 가방에서 전기톱을 꺼낸다. 드릉 하는 큰 소리에 놀란 화선이 몸을 덜덜 떤다. 내 말라버린 가지보다 얇아보이는 손목이 위태롭다. 화선이 나를 향해 걸어온다. 한번더 안아주려는지.
'이젠 기둥이 얇아져서 한 품에 들어올거야.'
나는 눈을 감고 화선의 품을 느낀다. 잘리는 나무기둥이 시큰하다. 화선을 위한 열매가 떨어진다. 큰 진동에 나는 사정없이 흔들린다. 큰 그늘을 만들던 이파리는 말라버려 바삭한지 오래고, 수분을 뺏겨 질깃한 나무기둥이 곧 꺾인다. 화선은 발로 나를 걷어찬다. 나는 종자때 느꼈던 흙을 온 가지로 느낀다. 그 땐 촉촉했던것같은데. 누워서 보니 고추밭도 흙 뿐이구나. 곧 여덟의 작은 차가 들어오고 구니와 함께 내린다.
'구니야, 화선이를 탓하지마.'
'여덟이는 많이 컸구나.'
'이렇게 너희를 보니 기뻐. 사랑하는 사람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