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서연 Feb 26. 2022

글로벌하다는 것은 외롭다는 뜻

"여러 언어 할 줄 아는 글로벌한 멋진 사람"의 뒷모습

https://brunch.co.kr/@seoryu15/40 <TCK 시리즈 이전 글>




<오바마가 인도네시아에 가서 느낀 씁쓸함>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대학교 졸업 후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쓴 편지가 세상에 공개된 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가 본인이 언제나 방문할 수 있는 집(home)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와 보니 자신은 이방인이 되어 있고 많은 것이 바뀌어져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As a graduate in 1983, returning to Indonesia where he grew up, he found  that he no longer belonged there. "I can't speak the language well anymore"
1983 인도네시아에 돌아갔을 때,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언어를 말할 수 없었다."


많은 TCK들이 고향을 방문을 한 이후에 느끼는 씁쓸함을 편지 내용이 잘 담아낸다. 나 또한 성인이 되어 인도네시아를 다시 방문한 후 영화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다른 TCK들을 보며, 이제 나이가 더 든 선생님들을 만나며, 취업준비/인생 살기 바빠져서 더이상 자카르타를 방학 중에 방문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며 이렇게 내 home이 또 하나 사라졌구나 실감했다.

흔히 파트너가 자신의 성별을 바꾸고 싶다고 커밍아웃한 사람들이 이후 받은 정신적 충격을 "사별을 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이 죽지는 않은 상태"라고 설명한다. 고향을 잃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 도시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다. 분명 사람들이 매일 일어나고 출근하는 살아있는 사회이다. 하지만 이제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버려서 그 도시와 나의 관계에 대해 정확히 단언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분명 같이 자랐는데 너무 달라져버린 친구나 가족을 바라보는 bittersweet한 감정이다.



<내 일본인 친구 데이빗>


내 오래된 친구이자 같은 TCK인 일본인 친구 A는 일본과 캐나다 혼혈이지만 부모님은 A에게 일본인 이름밖에 주지 않았고, 한 번도 캐나다에서 산 적이 없으며 캐나다 국적 또한 없는 (찐?) 일본인이다.

그의 모든 지인들은 그를 일본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의 일본인 친구들은 그를 데이빗이라고 부른다. 이유: 얼굴이 데이빗처럼 생겨서. 그의 여권, 학교 transcript, 그 어디에도 데이빗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일본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그만의 영어 이름인 것이다.

본인 스스로는 최대한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 사회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속감이라는 것은 내가 그 사회의 일부라고 생각한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상대 쪽도 내가 그 사회의 일부라고 생각해야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친구는 일본에 오래 살아서 영어로 말할 때도 일본어 악센트로 말하지만, 이 친구는 일본 사회에 계속 사는 이상 '너무 백인처럼 생겨서' 평생 데이빗으로 불릴 것이다.


<그 어떤 문화권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


옛날, 정말 10년 전만 해도 부모의 국적/문화권이 다른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저는 반 영국인, 반 스페인인이에요." "저는 반 일본인, 반 캐나다인이에요" I'm half ~, half ~.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하는 게 디폴트였다. 아직도 많이 쓰이긴 하지만 이 자기소개 방법은 애초에 자신을 완벽하지 않은 사람으로, 반으로 나뉜, 그 어떤 것도 아닌 애매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고 저는 영국인, 스페인 둘 다에요라고 말하는 것이 디폴트가 돼가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할리우드에서 The Joy  Luck Club 이후로 25년 만에 처음 나온 전부 동양인 캐스트로 유명한 영화 Crazy Rich Asian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영국/ 말레이시아 배우 헨리 골딩이 나오는 쇼에서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비디오. 에서 이것을 잘 짚어준다.


특히 포르투갈 / 흑인인 MC분이 한 가지만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왜 꼭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냐고 말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You're  not a little bit Black or a little bit Asian, You are or you are not.  And what's wrong with being both? Why is half not enough? People want  you to choose. But you can't choose. "
"조금만 흑인이고 조금만 동양인인 건 없어. 흑인이면 흑인인 거고 동양인이면 동양인인 거야. 그리고 두 개 다인게 뭐가 어때서? 왜 반인게 충분하지 않은 거야? 사람들은 항상 둘 중 딱 하나만을 선택하기를 원해. 하지만 이런 건 선택할 수 없어."


<"당신은 충분히 동양인인가" 검은 머리 외국인>


현재까지는 mixed race, mixed nationalities인 경우에만 이야기했는데 소속감의 문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글쓴이의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1학년일 당시 한번 이화보이스에서 동영상을 만들었어야 해서 동영상을 만들고 선배 기자님한테 첫 번째 완성본을 보여주자 "이거 완전 검은 머리 외국인이 쓴 것 같네?"라는 말을 들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말은 조금이라도 한국어를 다르게 하거나 한국어 능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바로 우리와 다른 그룹으로 분류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단어이다.

한국에서는 Holocaust가 일어난 적이 없다. 한국에서는 린칭(Lynching)이 일어난 적이 없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분류식 derogatory 식의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모르게 일상 표현에 잠재된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느끼면서 내가 여기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그들은 나를 일부라고 여기는지 다시 질문하게 된다.


<소속감의 문제>


TCK는 평생 소속감이라는 큰 문제와 함께 싸우면서 인생을 살게 된다. 한 곳에 평생을 살았어도 외방인의 얼굴을 하면 그 사회에 소속되기가 힘들다. 특히 한국, 일본과 같이 인종의 다양성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는 외적으로 조금이라도 '전형적인 한국인 외형'과 다르게 생겼으면 같은 한국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고 이것은 TCK들에게 큰 소속감 문제를 준다. 또한 잦은 이사는 어디 하나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계속 움직이는 삶을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던진다. 그럼 그 어린아이는 아직 사회에 대한 이해도 잘하지 못한 채로 어떻게든 살아가는 방법을 혼자 터득해야만 한다. 이사가 어떻게 아이에게 영향을 끼치는지는 영화 Inside Out(2015)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실제로 글쓴이는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다.) 일찍 이별을 연습하고 항상 약자의 입장에 위치한 전학생이라는 포지션에 자주 놓이면서 빨리 자라기도 하지만 빨리 자라면 그만큼의 대가가 항상 성인이 된 이후에 기다리고 있다.


<TCK의 우울증. 무기력>


그것은 나중에 무기력과 우울감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TCK들은 non-TCK들보다 우울증에 취약하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여러 것들이 합쳐져서 그런 것이다. 사회적 소속감은 행복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면(그리고 많은 경우 TCK들은 이것이 제대로 갖추어질 때 즈음 또 이사를 간다)  우울감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 보통 일 년에 한 번 이사를 간다고 하면(정말 많은 케이스가 이렇다) 일 년에 3개월은 이별을 한 상태에서 사는 것이다.(친구와 헤어지는 것이 연인과 헤어지는 것보다 더 힘들 때도 있다는 것을 알 사람들은 알 것이다) 무조건 한 사람이랑 만나야 하고 일 년이 지나면 무조건 헤어져야 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생각하면 쉽다. 헤어지는 것에 익숙해지긴 해도 절대로 괜찮아지지는 않는다. 평생을 움직이다 보면 그리움이 내 현실이 된다. 항상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다. 새로운 곳에 가면 사회마다 던지는 social cues가 달라서 그것을 못 읽었을 때 오는 무기력함도 있다. 한번 적응했는데 또 아예 다른 사회에서 적응하고 행복한 척을 해야 할 때 지친다. 안정감이 없다. 이전 친구들은 새로운 곳에 가서 다 잘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집은 어딘가 Where is home>
 

TCK에게 가장 슬픈 순간은  점점 나이가 들고 사회에서 홀로 서기를 할수록 TCK의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을 때인 것 같다. TCK가 사회에서 주류인 경우는 학교에 다닐 때 빼고는 없다. 사회에 나가는 순간부터 TCK가 아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TCK들은 흰 밥에 콩들처럼 흩어져 있을 뿐이다.

사회를 살면서 비슷한 배경의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것은 느끼고 있는 고충이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예를 들어서 일하는 여자로서 사회에서 살면 분명 일하는 여자들만 느낄 수 있는 고충들이 있을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서로만 공감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TCK들은 TCK로서 사회에 살면서 느끼는 고충에 대해서 애초에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굉장히 적다. 주류에 소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TCK의 숫자가 얼마나 적냐면 또래끼리는 사실상 한발, 두발만 가면  모두가 다 연결된 관계이다.) 직장에서 직장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기분이다. 친구를 못 사귄다는 말이 아니다. 친구는 다들 사귀지만 그 친구에게 항상 말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을 삼켜야 할 때 오는 답답함이다.


TCK 중에 가수, 연예인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표출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 느끼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보여주고 싶은 게 많은 법이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끝마치며>


흔히 잘 알려진 TCK의 화려한 면(다양한 언어 능통자)에 반해 이번 글에서는 TCK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 써보았다. 모든 사람은 충분하다. TCK들은 배경이 얼마나 뒤죽박죽이던, 얼마나 많은 문화권이 섞여 있던 존재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하지만 특정 문화권에 완벽히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그룹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오래 걸리겠지만 분명 그 그룹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이사를 가도 친구들과 연락을 계속하는 것이 더 쉬워지고 있다. 과거에 머물라는 말이 아니지만 확실히 인터넷의 확산은 TCK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TCK들에게 고향은 없다. 집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게 된다.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집이다. 모든 TCK들이 결국 각자의 집을 만들기를 희망하며 이번 편은 마치도록 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카르타 6개월 어학연수를 갔다 왔다 #인도네시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