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성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에 대한 존중을
박찬욱의 영화가 내게 선명하게 들어온 첫 순간은 <박쥐>였다. 이 영화는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인간의 아이러니와 금기를 집요하게 파고들지만, 그 기저에는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동화적 정서와 멜로드라마적 낭만이 흐른다. 오락적 완성도가 뛰어난 <복수는 나의 것>이나 <올드보이> 같은 복수극도 훌륭했으나 내 취향을 꿰뚫은 건 결국 <박쥐>였다. 일출을 마주하며 재가 되어가는 두 뱀파이어의 엔딩은 어릴 적 탐닉했던 '고전적인 영화의 엔딩장면'을 연상케 했다. 심지어 파멸과 파국으로 치닫는데도 우화적인 공기가 감도는 그 상반된 분위기라니.
시간이 흘러 마주한 <헤어질 결심>에서 박찬욱은 사랑을 한층 더 고귀한 층위로 끌어올렸다. 그가 사랑을 담아내는 방식은 지극히 고전적이었으나, 감독 특유의 파괴적인 종반부는 다시 한번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어쩌면 나의 취향은 '엔딩은 반드시 엔딩다워야 한다'는 보수적인 미학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근래의 영화들이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이런 '닫힌 파국'의 미학이, <헤어질 결심>에서는 오히려 더 특별하고 고전적인 위엄으로 다가왔다.
<헤어질 결심>을 처음 관람했을 때 뇌리를 스친 것 영화 두 편은 르네 클레망의 <빗속의 방문객>이나 마스무라 야스조의 <아내는 고백한다>였다. 영화 곳곳에는 클로드 샤브롤의 심리적 긴장감과 루키노 비스콘티의 탐미적인 미의식이 멜로의 형식 속에 유려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박찬욱은 그들의 유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승했고 덕분에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고전적인 향취가 짙게 배어 나오는 작품이 탄생했다. 나는 그 방식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절제된 묘사야말로 '사랑'이라는 고귀한 감정을 가장 밀도 있게 담아낼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인데 특히 이전의 박찬욱 영화에서 흔히 보이던 과한 베드신이나 신체 노출을 덜어내고도 이토록 지독한 정서를 구현했다는 점은 무척 고무적이다. 이런 부분들이 박찬욱 영화 세계의 리얼리즘을 살짝 덜어내고 우화적인 요소를 강화시키는데 나는 그런 점들이 좋다.
하지만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다. 이 영화에서 내가 느낀 '고귀한 사랑' 혹은 '고전적 멜로'의 문법은 앞서 언급한 서구 거장들의 작품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다. 그것은 오히려 8090 시절 홍콩 영화의 감성을 더 강력하게 자극한다. 세련된 도시인의 로맨스가 아닌, 서릿발 날리는 무협물이나 사극 속의 로맨스 말이다. 칼끝을 맞대던 적이 비 내리는 객잔에서 술잔을 나누다 서로의 정체를 알고 비극으로 치닫는, 그 투박하면서도 절절한 협객들의 정서가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와 닿아있다.
<서유기: 선리기연>은 시종일관 개그를 앞세운 모험 활극의 탈을 쓰고 있던 <서유기: 월광보합>에서 이어나가면서도 그 이면에는 지독할 정도로 깊이 있는 로맨스 서사를 숨겨두고 있다. 극 중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겠소"라는 대사는 본래 <중경삼림>의 명대사를 코믹하게 비튼 패러디에 불과했다. 그러나 속세의 모든 집착을 끊기로 결심한 후, 같은 대사가 다시 읊어질 때 그 무게감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다. 수많은 영화가 코미디로 시작해 억지 감동을 쥐어짜려다 실패하곤 하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숭고함'의 영역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존보의 선택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명확하다. 사랑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그녀를 포함한 모든 인연의 정을 놓아야만 하는, 즉 '금고아'를 써야만 하는 운명적 외통수에 몰렸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거짓말을 일삼고 자신의 진심조차 갈팡질팡하던 비겁한 사내 지존보가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책임을 지는 순간 로맨스는 비로소 완성된다. 고대 중국의 무협과 판타지라는 배경에서만 허락되는 이런 '의협심(義俠心)이 투영된 사랑'은, 현대의 매끈한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숭고한 디테일을 선사한다.
"강호에 뛰어든 지 어언 십여 년, 헛되이 꾸었던 거창한 꿈. 문득 돌아보니 일장춘몽 이어라"
영화 <동방불패> 속 조연들은 흔히 "그저 노래나 부르고 싶다"거나 "술이나 한잔하고 싶다"며 삶의 덧없음과 허무를 가볍게 내뱉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모든 허무 속에서도 유독 '연심(戀心)'에 대해서만큼은 그것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려 애쓴다. 천하제일이 되기 위해 규화보전을 얻고 스스로 여성이 된 동방불패. 그는 야망을 위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스스로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하지만 영호충을 마음에 두게 된 순간 그는 깨닫는다. 최강의 권력보다 한낱 인간으로서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마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멀고 험난한 길이었는지를.
그의 최후는 그래서 더욱 강렬하다. 절벽으로 추락하는 찰나, 영호충의 절박한 물음에 "당신이 평생 후회하도록..."이라 답하며 그를 밀어 올려 살려내는 장면은 오직 무협 영화에서만 허락되는 숭고함의 정점이다. 나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당신의 삶을 이어가라는 잔인하고도 고귀한 저주.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비극이 운명의 장난에 의한 재미를 줄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모든 야망과 생명을 던져 상대의 영혼에 '각인'되는 무협 특유의 숭고함까지 담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원한 미결이란 얼마나 낭만적인가. 낭만이란 비효율적이고 이성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 비효율성이야말로 현실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서 내 감성이 이때나마 조금의 울림이 생긴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서래가 땅에 묻혀 행방불명이 되어 영원한 미결이 되는 것, 지존보가 자하를 살리기 위해 금고아를 쓰는 것, 동방불패가 영호충에게 그날 밤에 있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끝내 대답해 주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는 것은 모두 스스로 결정한 행동이라는 건데, 사실 이게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진 않기에 되려 작품 안에서 멋지고 숭고하다. 요즘 미디어는 낭만이라는 단어에 무게추를 달아 분석하고 분해하며,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서 강요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차가운 분석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이 미련하고 비효율적인 낭만은 내가 영화를 통해서만이라도 일말의 한조각으로 남겨두고 싶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