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223: 마츠다 세이코 내한공연

by Slow walker

작년 마츠다 세이코가 내한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커리어 끝물에 노 제대로 젓는구나'였다. 이제 와서 뜬금없이 한국에 온다는 게 사실 잘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심드렁한 기분과는 별개로 나는 꽤 마츠다 세이코의 팬이다. 좋아하는 쇼와 시대 가수도 많고 음반도 많이 샀지만 그중 세이코의 비중이 단연 압도적이다. 궁금해서 그간 모은 걸 오랜만에 꺼내 봤더니 역시 난 팬이 맞았다.

1.jpg 서재 책상에 전부 깔아 두고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택도 없었다.

풀랭스 LP 20장과 7인치 싱글 20장 정도에 리마스터링 CD가 8장이니 대략 50장 정도를 소유하고 있었다. 쇼와팝을 좋아한다면 세이코라는 존재에서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일본팝의 태동기와 확립기를 경험하기 위해 호소노 하루오미나 마츠토야 유미를 접하고 오타키 에이이치를 좋아하게 된다면 이 거장들이 전부 세이코에게 대표곡을 써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곡가들을 쫓다 보면 결국 세이코에 닿게 되고 "어차피 다 들을 만하니 전부 사자"는 마음으로 80년대 음반들을 전부 소장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런 덕질에도 공연까지 볼 생각은 없었다. 데뷔 45주년이면 내가 아는 세이코와 지금의 세이코는 다를 게 분명했고 평소 아이돌 음악을 감상용으로만 소비하기에 공연 자체가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친구가 예매를 하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강매를 당해 보러 가게 된 것이다. 셋 리스트도 미리 조사했고 유튜브를 통해 대략적인 공연 연출도 알고 있었고 실제 공연 역시 예상대로 흘러갔다.

많은 사람들이 공연의 짧은 후기에서 '세이코가 한국어를 너무 열심히 해줘서 감동받았다'를 언급하고 있는데 나 또한 그랬다. 더 나아가 45주년인데 아직 63세인 점, 이런 나이인데도 '영원한 공주, 영원한 아이돌' 컨셉으로 공연한다는 점, 거기다 노력을 계속한다는 점(이건 현장에 가본 사람이 아니면 제대로 와닿기 힘들 것이다.) 공연을 보면서 점점 리스펙트의 마음이 커졌다. 내 일행의 옆자리에 앉은 어떤 팬은 공연의 하이라이트 '나츠노토비라'때 기어코 눈물을 흘렸다. 나도 그쯤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세이코는 욕심이 많고 그 욕심을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무엇보다 본인의 무대에 대한 애정이 크다는 게 와닿는 공연이었다. 그리고 45주년 다운 업계 '짬빠'에서 감탄했는데 공연을 진행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특유의 유머와 예능감, 관객석에서 유독 큰 소리로 튀는 말을 한 사람에게도 고맙다고 전부 대답해 주는 서비스, 갑작스러운 어쿠스틱 셋 라이브 무대의 앵콜 요청을 받아주는 즉흥성(이건 연출일 수도 있다.) 갑자기 관객석에서 한국어로 소리치자 "?" 하는 표정, 그러나 한국어를 못 해서 죄송하다며 한국어로 말하는 순발력 등. 개인적인 사심을 떠나 공연을 이끄는 무대의 주인공으로서 그간 경험해 보지 못 한 프로페셔널함을 느꼈다. -내 공연을 본 사람은 절대 날 싫어할 수가 없다-를 잘 알고 있는 느낌이랄까.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일행들 모두 " 뭐 이때 아니면 언제 보냐. 의리로 가야 하지 않겠냐.."의 자세로 보러 갔다가 잔뜩 조련당했고 세이코 능력에 감탄만 하고 돌아왔다. 일본 사람들도 이런 식으로 조련당했겠구나 싶었다. 그것도 45년간..


객석엔 매우 다양한 관객들이 있었다. 일본의 할머니, 아저씨, 20대 사람들. 그리고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우리나라 20대 여자애들, 옆자리에 혼자 보러 와 눈물 흘리던 일본 여성분. 80년대 세이코 라이브 때 우렁차게 '세-이-코!'를 연호하는 듯한 남성들, 쇼와팝 좋아하는 나 같은 일음덕후들도 많이 와서 즐겼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공연에서 가장 도파민이 터졌던 건 역시 본공연의 하이라이트였던 '나츠노토비라'였는데(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았을 거라고 본다.) Fresh! 부분에선 인스파이어 아레나의 모든 사람들이 떼창 한 거 같았다. 그리고 나의 세이코 입문곡이었던 '텐고쿠노키스'도 처음 도입부 때 감격적이었고, 드디어 공연의 시작을 알렸던 오프닝곡 아오이산고쇼도 당연히 좋았지만 'Eighteen'을 부르기 전에 본인은 이제 45주년 공연을 하고 있고 이 곡은 어린 시절의 곡이라 하즈카시이- 라면서 프로답게 잘 해냈던 그 순간이 역시 가장 인상적이었다. 아니 무슨 60대 가수가 와타시와 에이틴~ 이러는데 그게 안 이상할 수가. 더군다나 한국인에겐 존재하지도 않는 쇼와 시대 향수를 자극하다니, 어째서 난 그리움을 느끼는가. 거의 가스라이팅급 조련이 아닐 수가 없었다. 참고로 나는 모든 공주 컨셉의 무대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 전 엄마가 좋아하는 가수 정동원의 공연을 예매하고 모셔다 드렸다. 70대 엄마는 20대 가수를 보러 가고 40대인 나는 60대 가수를 보러 갔다. 음악이란 이렇게 온갖 나이의 사람들을 무력화시켜서 좋은 것이 있다. 예전에 봤던 공연들이야 형님들, 내 또래들이 비중이 컸는데 이젠 어떤 공연을 봐도 노장 가수가 아닌 이상 나보다 젊은 사람들 공연뿐이라 간만에 "누나 날 가져요" 할 수 있는 공연을 봐서 좋았던 점도 있었던 듯.. (물론 저런 말은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음량을 30으로 해놓고 시속 150킬로 밟으며 마츠다 세이코 투어 셋리스트로 만든 플리를 들으며 영혼을 불태웠다.


내한공연 셋리스트를 그대로 옮겨온 플레이 리스트

https://music.apple.com/kr/playlist/seiko-%E5%BE%A9%E7%BF%92/pl.u-Ymb0gNpUP1PxvAD

그리고 함께 즐기기 좋은 45주년 기념 베스트 앨범 (엄선된 곡을 재녹음했다.)

https://music.apple.com/kr/album/eternal-idol-eternal-youth-seiko-matsuda-45th-anniversary/1816116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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