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8: 일본 일러스트

by Slow walker

1월 도쿄에서 원래 사 오고자 했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일러스트북이랑 드래곤 퀘스트 1-2-3 바이닐. 하지만 내가 찾는 건 츠타야 서점에 없었고 아키하바라 게임-음악 매장에도 팔지 않았다. 역시 이런 건 그냥 아마존이나 스루가야 온라인이 장땡이다. 결국 까먹고 있다가 하야시 세이이치의 일러스트 엽서북과 타나카 미사키의 화집을 주문했다. 내가 일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즐기는 문화와 컨텐츠의 대부분이 일본산인 건 아니다. 그런데 유독 좋아하는 일본 것이라면 아무래도 게임이 그렇고 그다음은 현대 화가들과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품이다. (음악도 많이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음악의 약 30% 정도의 비율이라 여기에선 논외)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에서 그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경로는 제한적이다. 개인적으론 국내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품을 고화질로 태블릿+티비로 볼 수 있는 유료 서비스가 있었으면 좋겠다. 기획 전시 판매도 전부 연계되는 OTT 서비스처럼 내가 몰랐던 작품도 한 곳에서 감상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으므로 한 땀 한 땀 직접 발굴하고 찾아보고 혹시 굿즈나 화집을 판다면 구매하고 그러면서 살아야지..


최근에 꽤 인상적인 일본 전시 포스터를 보는 바람에 새로운 일러스트레이터를 알게 되었다.

09f73a70e46bfbb0c0f0e48a3a72ced4.jpg 猫が私にしたひどいこと / poshichi

섬세하고 우아한 일본화에다 고양이를 위트 있게 접목시켰다. 이 한 장만 봐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데 무엇보다 전시 제목이 고양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있으니 지을 수 있는 제목이라서 또 애묘가인 나로선 작가에 엄청난 어그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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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흥미로운 건 이 모든 작업을 디지털로만 하고 있고 아이패드로 작업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전통적인 민화에 가까운 일본화가 베이스다 보니 이 모든 게 디지털 작품이라 생각하진 못 했는데 작가는 A.I 작업이 아니라고 자주 강조하는 듯.. 하긴 요즘 같은 A.I 시대에 나오기 딱 좋은 감성의 작품들이긴 하다. 그런데 이 잔잔한 위트 속에 애정이 잘 보여서 엽서라도 몇 장 소장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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靜的인 일본화에 動的을 퓨전해서 특유의 개성을 준다. 그런데 그 속에 고양이 집사여야만 캐치할 수 있는 감성이 잘 들어갔다.


works in 2026 / 大久保如彌

오쿠보 나오미의 작품들은 인물의 표정이 묘사되지 않거나 아예 얼굴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인물이 등장하는 장소는 보통 실내인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은 장소도 실제론 실내를 실외처럼 꾸며놓은 듯한 인조적인 분위기가 크다. 그 한정된 공간에서 사실은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공존하는데 지극히 소녀적인 분위기다. 작가가 혹시 외모 콤플렉스가 있는 걸까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인터뷰 때 10대 시절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했었다고 한다. 어떤 콤플렉스는 작품으로 태어날 때 새로운 빛을 발하는 법이구먼.

works in 2019 / 大久保如彌

작품들을 서치 하던 중 내 취향에 가장 잘 맞았던 건 2019년 작품들이다. 인물들의 모습도 조금 더 역동적이고 표현하는 세계도 조금 더 초현실적인 면이 있다. 다른 작품들은 쇼와-헤이세이적인 터치가 느껴진다면 이 시기의 작품들은 어딘지 모르게 다이쇼 감성이 더 느껴지는 것 같다. 그리고 몇 가지 부분 때문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 탑 10에는 반드시 들어갈 오바야시 노부히코 <하우스>가 연상되는 부분이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기도.

23.JPG works in 2009 / 大久保如彌

특히 2009년의 이 작품은 더욱더 내가 좋아하게 된 이유가 명확해진다고 느꼈다. 이렇게 덕질을 하다가 문득 오쿠보 나오미가 오바야시 노부히코의 영화를 즐겨봤었다는 인터뷰 한 문장이라도 본다면 그때는 뭐 무언가가 폭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떠나서도 이런 정서는 일본에서만 구현되는 편이라 더 특별하게 느낀다. 여담으로 앤디 워홀의 팝아트적 감성을 가장 잘 이어온 곳은 일본이라 생각한다. 미국 놈들은 그걸 못 한다.


54993-48-0b441b05be9f75e1c6f2e1f5e123a3c0-3018x2213.jpg 日読み / たなかみさき (2025)

타나카 미사키의 일러스트는 상당히 현대적이고 코믹스에 가깝다가도 화풍이 하야시 세이이치의 그 무언가와 닮았다. 일상 속에 나른함과 권태감, 젊은 연인의 싱그러움 같은 공통분모가 꽤 있는데 재밌는 점은 '여성만의 아름다움'이란 테마를 남자 화백과 여자 화백이 표현하는 차이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참 원초적인 것이라 그 또한 흥미롭다.


works in 2018 初キッスはレモンの味 / たなかみさき

'첫 키스는 레몬맛'이란 표현을 남자 화백이 썼다면 일단 많은 여성들에게 좋은 시선을 못 받을 것이고 나는 남자임에도 '지랄하네'라는 말을 서슴없이 했을 것 같다.(물론 여성분들과 욕하는 이유는 전혀 다를 것이다.) 타나카 미사키의 일러스트는 위트가 있기 때문에 이런 소녀감성의 '폭력적인 달달함'을 단숨히 중화시켜 주는 매력이 있음.


613sypfnboL._SL1181_.jpg ずっと一緒にいられない / たなかみさき (2017)

하지만 근본이 달달한 일러스트라면, 역시 달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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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PfKmcVkAAyiir.jpg tissue please / たなかみさき (2021)

그렇지만 역시 제일 좋은 건 작품 속 인물이 ' 아 몰라 다 귀찮아' 하는 묘사들과 위트가 섞인 귀여운 작품들이다. 이런 점들이 하야시 세이이치와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 작가의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국내 웹툰작가인 고아라 님의 작품들이 떠오르곤 한다.


image.jpg 어서와 / 고아라 (2009)


고아라 웹툰 나오는 것마다 다 챙겨봤는데, 그 서핑이 소재로 나왔던 그 작품이 연중 되는 바람에 그 후로 여차저차하다가 이젠 웹툰을 따로 안 보는 사람이 되버렸네. 언제 한 번 다시 체크해 봐야겠다.


うで ピア / 樫木知子 (2015)

에또,, 역시 현대화에서도 해체주의는 한 번씩 일어나야만 하겠지요. 사견이지만 이런 작품은 역시 아크릴 작업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otafinearts-tomoko-kashiki-soup-of-memories-served-with-smiling-sunflowers-and-bones-2020.jpg Soup of Memories Served with Smiling Sunflowers and Bones / 樫木知子 (2020)

아크릴+린넨이라니 본인의 작품 세계관에 어울리는 소재를 찾는 건 역시 능력의 영역이다. 아무래도 일본 쪽 감성은 영화로 흡수한 게 많다 보니 이 작품의 소감은 -아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 베스트 10을 꼽으라면 반드시 들어갈 거라 예상되는- <녹차의 맛>에서 사치코의 시선이 느껴진다.


mirage / 村松千紘 (2020)

얼마 전 유튜브에서 기안 84가 이토 준지를 만나는 걸 봤다.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뜬금없이 왜 이토 준지 이야기냐면 일본은 코믹스 작가나 일러스트 작가나 서로의 격차가 없기도 하고 크게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라마츠 치히로의 화집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토 준지의 불사신 '토미에'를 뿌리에 두고 탄생한 미소녀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녀의 숨은 아름답고 그 Breath를 만드는 폐조차도 꽃으로 되어있다 이 말이야. 일본은 무슨 '미소녀'라는 보이지 않는 특정 장르가 각 분야마다 자리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뭐 나야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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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작품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또래-혹은 더 적은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작품이었고 그쪽이 내 취향에 맞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일러스트레이터를 뽑으라면 하야시 세이이치가 맞다. 아 일본에서 80-90년대에 발간한 일러스트집들을 한 권이라도 구했어야 했지만 아쉬운 대로 엽서 세트 주문한 걸로 만족해야겠다.

100+ad3b4acbef9cf1ce34f728c6bd4e6ff_b481130c_1280.jpg 宴のあと / 林静一

뭐 사실 이걸로 끝났지. 밴드 램프 Lamp의 최고 명반은 Yume인데 일러스트까지 최고 존엄을 써가지고.. 특별히 바이닐을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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