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동초춘
좋아하는 여러 가지 작품들이나 특유의 감각들 중 이에 해당되는 것에 미묘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어찌 보면 애매하지만 어떤 면에선 다양함을 아우를 수밖에 없는 찰나가 담겨있기도 하다. 뭐 우리네 일상들도 그렇다. 이 시기의 계절감은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지만 그래서 좋은 것도 있다. 문제는 우리가 아는 春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겠지만..
슬라임 처돌이는 결국 차에도 봉제인형을 놓게 되었다. 저 위치는 절묘하다. 룸미러를 볼 때마다 슬라임이 딱 보인다. 차를 꾸미거나 주렁주렁 다는 거 취미 없는데 이건 흡족한 거 보니 역시 내가 제정신은 아닌 거 같다.
서울 식물원에 갔다. 여긴 초여름 날씨였다. 경량 패딩을 들고 간 사람들 다들 벗어서 한 손에 들고 북적거리는 곳을 굼벵이처럼 걷는데 우리 집 몬스테라가 이만한 사이즈면 아주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네들도 제대로 된 환경에선 이렇게 거대해지는데 우리 집에선 시시해지는구나. 식물원은 좋지만 사람들 많은 곳은 역시 별로다. 여기서 일하면 마감하고 혼자 캔맥주 손에 들고 조명이 적당히 꺼진 사람 없는 이곳을 걷는다면 아주 좋을 거 같다는 망상을 하며 구경했다.
한때는 내 스스로 미식가라 생각했다. 장르별로 서울 내에 맛있다는 곳은 열심히 찾아갔고 맛의 '레이어', '깊이', '숙련되고 오래된 노하우' 등등에 나름 몰입하며 즐겼다. 이제는 그런 게 딱히 없다. 그냥 남이 차려준 집밥이 제일 맛있고 외식으로 느낄 수 있는 재미나 감동은 그다지 못 느끼는데 그나마 자주 찾아가는 곳이라면 이 쌀국수다. 요즘 쌀국수는 아무 데서나 먹으면 맛이 다 똑같은데, (아마 육수 납품처가 비슷한 듯) 여기는 깔끔하고 깊고 절묘한 조미료의 첨가로 밸런스가 좋다. 그리고 고수가 무한이라 회사에서 점심 먹을 때 국물 땡기면 무조껀 여기만 간다. 월 4회 먹어지는 식당은 여기가 이제 유일한 듯 싶다.
꽃등심 존나 비싸다.
안양천에 꽃이 피었다. 아주 예전에 안양천 벚꽃길이 제대로 정비되어있지 않았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이곳을 즐겨 찾았다. 이제는 사람들이 너무 부지런해지고 어디든 잘 찾아가는 세상이라 다른 동네에서도 보러 오는 명소가 되었다. 생각해 보니 또 벚꽃 개화 시기를 매해 체크하며 날씨도 예보 다 찾아서 최적의 날을 찾아 나들이 가는 것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이제 너무 재미없는 아저씨가 돼버렸다.
옛날에는 이런 풍경을 보면 와 너무 예쁘다. 라며 진심으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 사람 존나 많네 라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Sunny Day Service의 <東京> 앨범의 표지의 벚꽃과 개천이 서울의 안양천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Gemini에게 물어봤더니 도쿄의 지도리가후치가 배경이란다. 꽤 유능한 정보였는데 믿음이 가지 않아 검증해 보니 정말이었다.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앨범 표지의 메인 벚나무는 그곳의 벚나무가 아닌 식물도감에서 가져온 사진을 합성하고 보정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표지 디자이너 오다지마 히토시가 무려 80년대의 시뮬레이션 아트와 90년대 힙합 샘플링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방식이라고 한다. ..뭐 여기까진 너무 TMI인 듯.
불광천에도 벚꽃이 피었다. 뭐-밤 마실이라도 다녀올까 싶어 나갔다가 막 레이저 쇼하고 분수쇼 하고 지랄이 났고.. 산책로엔 우리나라 어느 곳 행사장에서나 다 파는 뻔한 간식거리들을 파는 부스들이 있었다. 아 여기 축제하는 곳이구나. 산책로에서 벗어나 도로의 인도로 걷다가 여기도 사람이 많아 아예 길 건너편에서 멀찌감치 쳐다봤다. 도로 하나만 건넜는데 개천의 벚나무와 사방에 퍼지는 조명들이 너무 안 어울려서 그게 또 매력적이었다. 야 여기가 무슨 90년대 말 테크노 클럽이냐.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을 이정현의 '와'로 바꿀까 잠시 고민하다 관뒀다.
몬스테라가 한 때 플랜테리어 유행할 때 가장 각광받는 식물이었다. 그리고 다들 몬스테라는 그냥 던져놔도 안 죽는 키우기 좋은 식물이라며 추천하곤 했는데 나는 몬스테라를 죽인 적이 있다. 물론 잘 자란다. 그런데 이상하게 벌레가 잘 꼬인다. 다른 집도 그런진 모르겠는데 우리 집에선 그렇다. 키우기 까다롭다는 보스턴 고사리는 습도조절 없이 사나이답게 막 키우고 있고 벌써 세 번째 포기 나누기를 했다. 식물 고수는 아니라서 이런 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언제 봤던 한 남자의 식물 영상 콘텐츠에서 "집에서 식물을 다양하고 많이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식물을 자주 사면 됩니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게 참 맞말인 게 집에 화분이 10개가 넘어가면 모두 컨트롤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금빵에 개지랄해 놓는 걸 싫어한다."라는 나의 의견에 따라 빵순이가 새로운 한 가게의 소금빵을 가져왔다. since 1993을 보고 놀랬다. 이제는 90년대에 개업을 해서 지금까지 유지된다면 그곳이 클래식으로 통하는 곳이 되었다니.. 소금빵의 맛은 당연하게도 소금빵 맛이었다. 그런데 함께 포장해 온 리플파이가 존맛이었다. 이런 식감이라니 역시 자고로 디저트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이곳이 빵지 순례도 오는 가게로 통한다는 말을 하길래 " 확실히 여기는 좀 치는 거 같구나." 라며 감탄을 거듭했는데 뒤이어 빵봉투에서 나오는 두쫀쿠와 버터떡을 보고 슬픔이 밀려왔다. 곤조 있는 since 1993을 붙이고 개지랄하지 않는 소금빵을 파는 가게여도 유행에 뒤처지면 훅간다는 잔인한 현대시대의 법칙에 따라 이런 족보도 없는 디저트를 팔아야 하는 사장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친구에게 선물 받고 재밌게 읽은 책이다. 띠지에 쓰여있는 문장이 너무 좋았고 실제로 책을 전부 읽은 뒤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었다. 그리고 현재 내 타이밍에 잘 맞는 책이었다. 고전 문학을 잠깐 소개하는 에세이 방식의 글들 모음이었는데 문득 5년 전에 처음 브런치에 가입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 어떤 위기감을 느끼고 개설한 공간이었다. 이러다가 멍청해지는 일 밖에 안 남은 듯한, 그러나 첫 글을 쓰고 2년 넘게 방치했었다가 비공개로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아무 글이나 일단 작성하고 놀았다. 이곳은 글을 공개하려면 '작가 신청'을 해야 하는 게 영 재수가 없어서 비공개로만 쓰다가 몇몇 지인들의 요청과 '월간 씨블모 기록'을 위해 공개할 필요가 조금 생겨서 오픈을 했다. 기왕이면 남들이 보기에 소소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는 글은 간간히 공개하기로 했다. '생각의 무게추'를 단다는 것은 삶에 있어 꽤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는데 추를 달아야만 실질적인 내 마음이 되는 것들이 있다. 딱 이 공간이 내 생각의 무게추를 다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것에 집착은 하지 않되 금방 휘발시키지는 말자는 취지로.
그런 의미에서 저렴한 빔 프로젝터를 사서 침실에 세팅했다. 집에 남는 애플tv 4k도 있으니 그거 달아서 써봤는데 화질이 역시 어디까지나 장난감 정도의 퀄리티지만 말 그대로 재미는 있다. 자기 전에 화질 구려서 사놓고도 안 본 구글무비 같은 걸로 간단한 고전영화 보는 정도로는 괜찮은 거 같다.
종로 일대의 노포 중국집의 짬뽕은 매우 훌륭하지 않아도 그래 이게 짬뽕이지 하는 맛이 있다... 정도였는데 아, 여기는 백짬뽕을 먹어야 하는 집이었구나. 백짬뽕은 훌륭했다. 짬뽕은 의외로 스킬의 음식이다. 다양한 국물 음식이 있고 면요리가 있지만 짬뽕은 '수십 시간 우려낸 육수' 같은 게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재감 강한 소스를 끼얹는 음식이 아니고 볶은 재료에 물을 넣어 조미료 넣고 끓은 뒤 면에 말아먹는 거라 이게 한 끗 차이로 음식의 퀄리티가 너무 변한다. 정말 잘하는 집은 맛있고 그게 아닌 집은 음식 자체에 대한 매력을 못 느끼게 된다. 쓰다 보니깐 또 짬뽕이 땡긴다.
우리 집 너구리가 살이 빠지고 있다. 그리고 전보다 활동적이지 않게 되어간다. 고양이는 개와는 다르게 좀 더 늙어도 티가 덜 난다. 그래서 노묘란 말은 단어 자체가 주는 감정이 조금 서글프다. 병원에서는 전신 마취를 하기가 병원 입장이든 보호자 입장이든 부담스러운 나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엔 아직도 애기 같다 느끼다 보니 저 말에서 오는 어색함이 이상하게 사무치게 다가왔다. 그래서 당분간 한 때 싸롱이라 불리기도 했던 우리 집에서의 단체 홈파티는 없애기로 했다. 그리고 올해 계획했던 여행 일정도 올스톱하기로 했다. 당장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니지만 애들과 집에서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집중할까 싶다. 얘네들이 아기 고양이었을 때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면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 늙은 고양이가 되니깐 그때처럼 전화를 걸고 싶어졌다.
근사한 봄날씨에 아이스커피 하나 들고 미술관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라고 일단 썼지만 그냥 개더웠다. 늦겨울과 초여름만 존재하는 봄이라니. 하긴 1년이란 시간을 어찌 사계절로 칼같이 나눌 수 있겠냐만은
냉면의 계절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