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남녀공용 샤워실의 고시원을 알아?

by 주연

요즘같이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성인이 된 이후로 처음이었다. 누가 봐도 투병 중인 사람처럼 민머리를 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후회가 번져 나와 나를 잡아먹곤 했다. 대학 시절의 나는 나름대로 치열한 청춘을 살아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그 과정에서 겪은 가난의 설움은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번져 굳이 시간을 내어 엄마 아빠를 보러 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엄마와의 추억을 끄집어내려면 청소년기, 혹은 유년기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잊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것 역시 이제 와서 깨달은 일이지만, 난 엄마와 데면하게 지낸 그 시간들에 끊임없이 엄마를 그리워했던 것 같다.




대학생이 되어 집을 나온 후, 말을 건넬 이가 없기 때문에, 만약에 있다고 하더라도 의아한 눈빛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이지 나는 자주 집에 있으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말 간절하게, ‘집에 가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의 나는 매우 다양한 ‘집’에 이미 머무르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나는 대학 생활 동안 지겹게도 떠돌아다녔다. 흔히들 청춘과 방황의 관계를 모순으로 보지 않는 데는 그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난 스스로 청춘이라고는 생각했으나 그런 종류의 방황을 원한 적이 결코 없었다.


막 대학생이 되어서는 무난하게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2인실이었던 그 방은 딱히 모자람도, 쾌적함도 없는 공간이었다. 함께 지내게 된 룸메이트는 한 학년 위의 경영학과 선배로, 친언니의 후배라 나를 은근히 챙겨주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조금 더 외향적이거나 사교적인 성격이었다면, 혹은 기숙사에 정을 붙이고 머물렀다면 그 언니와 멋진 추억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서투른 내성적인 성격인 데다, 그런 성격을 지니고도 자는 시간 외에는 내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던 나는 아쉽게도 그 기숙사에서의 추억이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머무르는 시간이 워낙 짧았기에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던 기숙사는,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야 겨우 어렴풋이 떠오를 정도로 끝내 낯선 공간으로 남았다.


그렇게 나는 그 뒤로 많은 공간을 크게 정 붙이는 일 없이, 그 공간의 모양새를 잊어도 아무런 미련이 없을 정도로 담담하게 거쳐왔다. 하지만 그 공간들은 분명 그때 당시의 내게 있어 몸을 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일과를 마치는 시간이면 ‘집에 간다’고 말하며 향하는 공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어도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공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3년이나 일했던 수제 맥주집 근처의 남녀 공용 고시원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21살의, 한참 미래에 대한 고민이 컸던 나는 호기롭게 휴학계를 내고 돈을 모으고 있었다. 글을 쓰며 살고 싶다는 오랜 꿈에 대한 욕망이 커질 대로 커져 있었으나 한계를 깨닫고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어딘가로 떠나자. 깊이 있는 글을 쓰기엔, 작은 시골에서 자라 이제 겨우 도시로 나왔을 뿐인 나의 경험이 한참 모자란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꿈을 향한 목표가 있기에 돈을 아끼는 일이 힘들지 않았다. 내 몸 하나 뉘면 가방 같은 짐을 두기에도 비좁은 고시원 방에서 지내는 일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공용 주방에 가면 김치와 밥이 늘 준비되어 있다는 점이 가장 맘에 들었던 그 고시원은 월세 2만 원을 더내면 복도 쪽 창문이 있는 방을 쓸 수도 있었지만 난 망설임 없이 창문 없는 방을 선택했다. 그때 당시에는 창문 하나로 삶의 질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전혀 모를 정도로 어리고 무지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꿈꾸는 청춘’이었다. 내 몸이나 정신을 혹사시켜도 꿈만 있으면 괜찮다는, 눈물겨운 마음가짐이었다.

1년 정도 머물렀던 그곳은 상상을 초월하게 좁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다름 아니라 샤워실이 ‘남녀 공용’이었다는 점이다. 흔히 볼 수 있는 공중화장실처럼 칸이 나뉘어 있었고, 그 안에 변기 대신 샤워호스가 하나씩 있었다. 그 칸은 5~6개쯤 있었는데, 심지어 세면대는 바깥에 있어 무심코 세면대 앞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다 보면 웃통을 벗은 채 샤워실 칸으로 들어가는 아저씨들이 거울에 비치곤 했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엔 더욱 상상도 할 수 없는 환경이지만, 놀랍게도 한 달 월세 18만 원짜리 고시원의 현실은 그랬다. 아마 대학교 근처가 아니라 유흥가가 밀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그나마 안심되는 점은 수제 맥주집 서빙 일이 저녁 여덟 시에 시작해 새벽 다섯 시에 끝이 났기 때문에, 사람이 없는 시간을 골라 샤워실을 이용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정도 방심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느 때와 같이 새벽 다섯 시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실 칸에 들어가 물을 틀었을 때,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기 전까지.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은 바로 옆 칸으로 들어가더니, 뭘 하는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잠자코 있기만 했다. 샤워기 물 트는 소리도,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3분 정도가 흘렸을까, 오소소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무서워진 나는 샤워기를 틀어놓은 채로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쪽에 비켜서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습기가 가득 찬 칸 안에서 옷은 또 어찌나 내 맘대로 안 입어지던지. 그렇게 나는 옷을 걸치자마자 재빨리 뛰어나왔다.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근 뒤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서 있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복도 쪽에 귀를 기울였지만 다행히도 다른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내 몰골을 살펴보니, 몸의 물기만 겨우 닦고 젖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였다. 샤워기를 끄지 못한 것도 뒤늦게 생각이 났다. 그리고 어떤 감정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수건을 꼭 쥔 채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엎드려 끅끅 거리며 울었다. 그 와중에도 무서워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정말 간절하게,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런 일을 겪고도 1년을 꾸역꾸역 버텼지만, 집안 사정으로 그 고시원에서 이루고자 했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또다시 집을 옮겨야 했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은 돈으로 학교 근처의 여성 전용 고시텔을 구할 수 있었다. ‘여성 전용’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어서, 한 달에 35만 원이나 하는 월세도 순순히 감당했었다. 그 뒤로도 보증금이 없다는 이유로 무리를 해서 들어갔던 월세 40만 원짜리 원룸, 바퀴벌레가 너무 많았던 상가 바로 위 단칸방, 지도 교수님의 배려로 1년간 머물렀던 교수님 댁 아파트까지. 많은 공간을 전전하고 또 그 공간을 집이라고 부르는 동안, 그 남녀공용 샤워실 사건 외에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수없이 많았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흔한 순간들부터, 실연의 상처에 엉엉 우느라 휴지를 산처럼 쌓았던 순간에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좌절감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던 순간에도. 수많은 순간들에 ‘집에 가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깨달았다. 나는 그토록 ‘집에 가고 싶다’는 말로 그리움을 감추고 살았구나. 집에 가고 싶다고 외치며 안정과 위로, 따뜻한 무언가, 즉 엄마를 그리워했음에도, 한 번도 그 순간들에 엄마에게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엄마도 내가 사는 공간을 궁금해하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특히 그 남녀공용 샤워실의 고시원에서 짐을 빼야 할 때, 부산에 들른 아빠의 트럭에 짐을 싣기 위해 내 방문 앞까지 왔던 순간에도, 엄마는 기어코 그 문을 열어보지 않고 문 앞의 짐만 들어 트럭에 실었다. 나도 그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머물렀던 공간 중 유독 강렬한 기억을 남긴 그곳에서의 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로 남겨두었을 뿐. 그리고 이제 와서 그것이 뒤늦게 가슴 아프다. 그 순간들에 ‘집에 가고 싶다’고 에둘러 말하지 않고 ‘엄마, 보고 싶어’라며 사실을 말했더라면 우리는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엄마는 나를 어르고 달래는 엄마 역할을 하며 딸 앞에서 당당하게 굴 수 있었을까. 마주 앉아 함께 웃으며 떠올릴만한 추억 몇 개쯤 만들 수 있었을까. 나는 스스로가 진정 그리워하는 것이 뭔지도 몰랐던 바보였고, 그러니 늘 ‘집에 가고 싶은’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 보고 싶어.”


이 말을 하기까지 이토록 오래 걸리다니. 이번 주말엔 집에 들러 짐짓 무용담이라도 말하듯 엄마에게 말해주어야겠다.


“엄마, 나 실은 남녀공용 샤워실이 있는 고시원에 살았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