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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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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Nov 30. 2020

혜정씨

  1955년쯤 태어난 것 같은 혜정씨. 내 마음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반 교실로 쑥떡을 가져다주었을 때 혜정씨는 벌써 오십하고도 여러 해를 살았었나 보다. 나는 그녀가 상자째 이고 온 쑥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난번 모의고사에서 1등 한 친구의 엄마는 콩고물을 묻힌 설기떡을 보내주었다. 그 전 중간고사에서 1등 한 친구네는 팥이며 꿀이 든 송편을 보내왔다. 그러고 나니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쑥떡이 너무 밋밋해 보였던 것이다. 입을 벌리며 웃고 있던 혜정씨에게서 떡 상자를 받아 들 땐 덩달아 기뻤는데, 친구들에게 떡을 돌릴수록 자꾸만 쑥떡을 든 손이 부끄러웠다. 발가벗은 채 쑥떡 하나 덜렁 들고 그들 앞을 순회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떡이 제일 쌌나? 그녀에게 답례떡을 맡겨버린 엄마가 자꾸 미웠다.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도, 운동회에 엄마 대신 혜정씨가 오는 일이 있었다. 읍내에 사는 그녀는 면에 있는 우리 학교까지 먹을거리를 잔뜩 싸들고 왔다. 버스를 타고 왔는지 택시를 타고 왔는지 모르지만 한참 헤맸던 것이 분명하다. 치킨이 차갑게 식어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운동회 같은 것이 낯설었을 그녀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손에 쥐어주었던 누런 치킨은 따뜻하진 않았지만 맛있었다. 나는 성인이 되고 난 뒤 덜컥 그 맛이 그리워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찾아보았지만 끝내 다시 맛볼 수 없었다. 그 치킨을 다시 한번 맛보기만 한다면 살다가 지게 된 돌덩이 몇 개쯤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 사실 솔직히 말하면 간절한 것은 치킨이 아니다.


  그녀의 집에 언니와 함께 하룻밤 자러 가기라도 하면 갈비찜을 맛볼 수 있었다. TV도 실컷 볼 수 있는 것은 덤이었다. 요리를 잘했던 혜정씨는 자꾸만 먹을 것을 차려주었다. 갈비찜을 다 먹으면 생선을 굽고, 생선까지 발라 밥을 다 먹으면 직접 담은 식혜를 내오는 식이었다. 그 식혜. 식혜가 참 달고 맛있었다. 기쁨을 숨기지 않는 그녀의 말간 얼굴을 보는 일도 꽤나 달았다. 어린이가 느낄 수 있는 최대의 황홀을 담은 그 식탁을 혜정 씨는 그 후에도 여러 번 차려냈다. 


  내가 너무 자라 더 이상 그 집에 가지 않게 되었을 때쯤 혜정씨는 처음으로 남자와 함께 살았다. 그 남자는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소와 방정맞게 울어대는 흑염소 같은 것들을 동시에 키우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언니나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 소를 팔아서라도 학비를 대주겠다고 했다. 과한 호의에 고마움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대학에 들어간 뒤 나는 그를 개새끼,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점점 외박하는 일이 잦아졌던 그가 어느 날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 내가 사랑해마지 않았던 황홀한 밥상을 내오게 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남자를 기다렸던 혜정씨는 그 개새끼에게, 그 여자에게 한마디 묻지도 못하고 밥상을 차려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다 먹은 상을 묵묵히 치우기까지 했다고 했다. 엄마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 나는 가끔 이를 갈면서 개새끼, 하고 내가 가장 자주 뱉을 수 있는 욕으로 그 남자를 불렀다. 


  혼자가 된 혜정씨가 나도 모르는 새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들은 것은 ‘죽은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아마 그녀일 것이라고 했다. 불과 몇 달 전 마지막으로 했던 전화 통화가 떠올랐다. 몇 번이나 거절한 끝에 받은 모르는 번호였다. 나는 혜정씨의 바뀐 연락처를 알지 못했는데, 그녀는 내 연락처를 알고 있었다. 네가 잘 커주어 고맙다, 던 그녀는 한참을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울었다. 이제는 술을 끊고 병원에서 나와서 산다고 했다. 나는 귀찮은 마음을 대충 감추고 말했다. 


  술 진짜 안 먹나? 술 안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으면 내가 꼭 보러 갈게. 약속할 수 있제?


  약속을 지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혜정씨는 술을 계속 먹었고 운동도 하지 않아서 배에 술이 가득 차 버렸다.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갈 마음도 품지 않아서 몇 개월이 지나도록 죽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그녀도,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최선을 다해 자위해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나는 밋밋한 쑥떡과 식어 빠진 치킨과 황홀한 갈비찜만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한동안 후회, 그 자체가 되어 떠다녔다. 이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바쁘게 산다는 이유로 외면하다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 중 가장 큰 것은 그녀, 혜정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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