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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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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Dec 06. 2020

이별인 줄 알았던 생존

  사는 게 고되면 마음이 약해진단다, 너무 힘들 때 이성을 사귀지 마렴. 어른들의 말씀에는 늘 배울 구석이 있었다. 꼭 당신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먹는 쪽이든, 절대 당신같이는 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는 쪽이든. 감사하게도 나에겐 전자의 경우가 훨씬 많았다. 감사할 뿐만 아니라 참으로 운이 좋았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 말을 들으면서도 감탄을 탄식처럼 뱉으며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활을 보면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당신의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던 저 어른은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번쯤 겪어 버렸던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일찍 알려주시지 그랬어요,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그게 얼마나 소용없는 말인가를 깨달았다. 누군가 내가 태어나자마자 하루도 빠짐없이 마음이 약해질 때를 조심하라 일렀어도 그 일들을 막을 순 없었을 것이다.




  그와의 시작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장면을 가져올 수도 있겠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굉장히 상징적이었던 그때를 떠올리고자 한다. 동아리 MT를 갔던 날, 이미 졸업해 직장인이었던 그가 굳이 찾아와 함께 MT를 즐겼던 날. 나는 새벽까지 놀다 뻑뻑해진 눈에 넣을 인공눈물을 찾아 헤매다 그에게 말했다. 


  "선배, 눈물 좀 주세요."


  그가 건넨 인공눈물이 눈을 타고 뺨으로 흘러내렸다. 눈물을 건네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그 인연은, 질식해 죽기 직전에 가까스로 헤어 나왔을 만큼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지나간 삶을 애써 아름다운 시선으로 보는 일에 가히 전문적인 경지에 이른 나지만 그 인연에 대해서는 포기하고야 말았다. 시작하지 않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부터 주눅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대인관계가 넓은 편은 아니었으나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고, 버텨내는 삶을 존중받고 있었으며, 생계와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는 스스로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흔들리는 젊음이 누구에게나 그렇듯 조금만 건들면 멍이 들 것 같은 여린 살점을 여러 군데 갖고 있었다. 그는 그런 부분을 문제 풀 듯 파악하고 파고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난한 티는 내지 않는 게 좋아."


  어쩌다 화두가 된 스테이크를 써는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 그곳은 그때 당시의 내겐 경험할 일이 전혀 없는 장소였다. 이 사실은 내가 아닌 다른 대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며, 직장인이 된 지금의 내게도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는 저런 말을 했다. 내가 해맑게 그런 곳에 가보질 않았다, 는 말을 한 뒤였다. 한 번도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순수하게 당황했다. 그 와중에도 그가 무안할까 봐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던 것이 순수했다는 말이다.


  "그런 고급 식당도 가봐야지, 그래야 나중에 갈 일 있을 때 무시받지 않아. 내가 데리고 가 줄게."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많은 것들 중 하나야, 라는 듯이 흡족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에게 나는 그저 웃어 보였던 것 같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어떤 느낌을 외면하려 애쓰며 웃었다. 이제 너도 누릴 수 있는 것은 누려야 하지 않겠냐는 그의 말이 조금은 달콤했던 것도 부정하진 않겠다. 그 뒤로도 그가 베풀고, 나는 구제받는 듯한 높이의 차이가 하루하루 쌓여갔다. 나는 고개가 꺾여 가는 것을 알면서도 종종걸음으로 그를 좇아 다녔다. 어쩌면 정말로 내가 놓쳐버린 많은 것들을 그가 찾아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으로.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경제적인 버팀목 정도는, 저 사람에게 바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연약한 생각으로.


  하지만 나는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증거는 도처에 널려있었다. 매일 밤 울며 잠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나 그를 좇으려 고개를 쳐들고 있는데도 마음은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쁜 회사 일로 힘들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많은 일을 정당화하려 했다. 주말에 나를 만날 시간은 없어도 동네 누나와 산책할 시간은 있었다.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는 일이 허다한데도 걱정하는 나를 ‘직장생활 안 해 본 학생’이기 때문에 보챈다며 나무랐다. 그때마다 나는 그와의 간극을 메우기보다 포기하고 싶어서 여러 번 기권 선언을 했음에도, 그는 끈질기게 나를 잡아 가두었다.


  그렇게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나는 대놓고 휘두르지 않더라도 서서히 사람을 갉아먹고야 마는 말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자존감을 바닥까지 짓밟음으로써 우위에서 관계를 장악하는 기술의 존재 또한. 지금이야 “가스라이팅”이라는 적절한 용어가 존재하지만 그땐 그런 것의 존재를 미리 알 턱이 없었다. 오롯이 내가 당하고 산산이 부서지고 나서야 알았던 것이다. 이 관계는 정상이 아니구나, 하고 가까스로 깨닫게 된 계기는 여러 번에 걸쳐 있었지만, 최초의 순간은 저항할 생각도 못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였다. 그는 그의 일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대해 내 탓으로 미루길 즐겼는데, 한 번은 늦은 밤 통화를 하다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귀걸이를 왜 하지 않느냐는 그의 말에 귀를 뚫은 적이 있지만 잘못 뚫었어서 그냥 다시 막아버렸다는 대답을 했다. 그는 그 말을 듣더니 아주 재밌다는 듯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귓구멍도 아다가 아닌데, 어디가 아다야?"


  저 단어의 저급한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모른 채로 살아주길. 알아봤자 좋을 것이 없는 저질스러운 단어였다. 다른 이도 아닌 연인이라는 사람이, 저 단어로 나를 불렀다는 사실에 속절없이 눈물이 났다. 충격에 사로잡혀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냐며 우는 나에게 그는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아, 또 우는 거야? 나 지금 잘 시간인데, 내일 출근해서 피곤하면 네가 책임질래?"


  더 믿기지 않는 것은, 저 말에 내가 꾸역꾸역 울음을 참았다는 것이다. 울음을 참고,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피곤할 텐데 얼른 자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 전화를 끊고 난 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 그가 뱉은 말의 무례함이나 그 말로 인해 상처 받은 나의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모든 상황들에 저항할 생각도 못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아주 바보는 아니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 빨리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부터 적어도 나에겐 사랑이 아니었던 이 관계로부터.




  그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나를 괴롭혔다. 헤어지고 난 뒤에도 나를 쥐고 흔들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가벼운 말투로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그 관계가 사랑이 아니었던 것을 깨달았으므로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당신 생각만 하면 화가 나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대체 나를 왜 그렇게 대했느냐, 는 말 따위를 실컷 퍼붓고 나서야 연락을 멈췄다. 나는 그를 쳐다보느라 한껏 꺾여있던 시선을 바로잡고 혹시나 내가 다신 없을 버팀목을 놓치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했던 연약한 살점을 잘라내는 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빳빳한 목이 유연해지고 연약했던 곳에 굳은살이 대신 박히기까지 아주 괴로웠지만 모든 면에서 그가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나았다. 그래, 바로 그거다. 내가 좀 더 어른이 된다면 사는 게 고되서 마음이 약해져 있을 소녀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네 인생에 있어 그놈 따위,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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