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자고 행복한가. 느지막이 눈을 뜨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째서 지금 마음속에 거리낌 하나 없으며, 편안한 것을 넘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엄마의 암 크기가 절반이 넘게 줄었다. 처음엔 수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퍼져있던 암세포가 많이 사라졌다. 덕분에 엄마는 8차례의 항암을 무사히 마치고 수술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 과정은 단 몇 문장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내가 자세히 묘사하려 시도하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로 당신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불쌍한 엄마라는 사무치는 딸의 정서를 이제라도 털어내라는 듯 고요하고 담담했다. 지난 주말이 끝나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 여전한 엄마의 민머리를 남겨두고 돌아왔다. 항암 부작용으로 엄마, 하는 부름에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모습을 뒤로하고 돌아왔다. 그러니 마음이 무거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죄스러운 마음이라도 품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어쩌자고 지금 마음이 편안한가.
당장 가야 할 곳이 없으면 질문은 꼬리를 무는 법이다. 질문은 때로 잘 질문하는 것 자체로 답이 될 때가 있다. 그것이 삶에 대한 질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행복해졌는가. 3년 전쯤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정적이라는 직업을 가졌다. 적어도 앞으로 30년은 먹고 살 걱정이 없었다. 지겹도록 나를 괴롭게 했던 ‘끼니 걱정’에서 벗어났다. 그 기쁨은 단순히 직업을 가졌다는 성취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살았다, 는 생사에 대한 안도에 더 가까웠다. 고정적인 수입이 있다는 건 앞으로를 계획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오늘만 살아내던 사람에게 내일이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물질적인 냄새 풍기는 기쁨으로만 정의할 수 있느냔 말이다. 어쩌면 그때부터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만 살던 그 날들엔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 보면 자기 생각이 나.”
여러 사람이 추천해주는 어느 드라마를 보기 위해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시도’라고 말하는 것은 첫 화를 보자마자 더 이어 보는 것에 실패해버렸기 때문이다. 드라마 주인공을 보면 네가 생각난다는 말에 낯간지러워했던 것이 우습게도, 첫 화를 보기 시작한 순간 나도 내 생각이 났다. 딱 봐도 어렵게 사는 티가 나는 여주인공은 계약직으로 일하는 회사에서 믹스커피를 한 움큼 훔쳐와 큰 컵 가득 타 먹는 것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나는 그 장면에 진심으로 몰입해버리고야 말았다. 호프집에 출근해 믹스커피 두 개를 300cc 맥주잔 가득 타 먹는 것으로 배를 채웠던 시간들이 화면에 겹쳐졌다. 저러면 위가 다 상하는데, 저렇게까지 궁상떨지 않아도 될 텐데, 이미 내가 되어버린 화면 속 연기자에게 애가 타서 드라마를 꺼버렸다. 저 장면이 나중엔 결국 주인공이 딛고 나갈 과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내가 겪어본 이상 ‘밥 대신 믹스커피를 타마시네. 불쌍하네.’ 정도의 감상으로 넘길 순 없었다. 유난스럽게도 드라마를 끄고 나서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그래, 나의 이십 대를 관통하는 바로 그 시절의 햄버거가 떠오른다. 거창한 행복의 서사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시시할 수도 있겠다. 행복이라 부를 만한 것들을 더듬어보니 깜찍하게도 햄버거가 둥둥 떠오른다. 밤새 알바를 하던 호프집에는 주방 이모가 두 분 계셨다. 두 분 모두 너그러운 분들이셨으나 나이가 조금 더 많고 덩치도 조금 더 크신 큰 이모는 유달리 호탕한 분이셨다. 일솜씨가 있을 리 없었던 처음의 나는 실수가 잦았다. 손님으로 테이블이 꽉 차는 저녁 8시부터는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거리기 일쑤였다. 맥주나 소주 같은 것들의 존재 자체를 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으므로 필스너니, 바이젠이니 하는 수제 맥주 이름부터 몇십 가지나 되는 안주 종류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나중엔 대여섯 개씩 번쩍번쩍 들게 됐던 맥주 500cc 잔도 처음엔 사람이 이렇게 큰 잔으로 술을 먹나, 놀라곤 했다. 그러다 넋을 놓고 안주를 잘못 내가 기라도 하면 큰 이모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모는 호통을 치시다가도 금세 밥은 먹고 왔냐며 과일 안주가 나갈 때마다 사과 한 개를 더 썰어 따로 챙겨주시곤 했다.
“니 불고기 버거 좋아하나?”
이모는 때로 개구쟁이같이 웃으시곤 했는데, 잔뜩 얼어서 좀처럼 활짝 웃을 줄을 몰랐던 나 까지도 입꼬리를 올리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이모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바닥을 쓸고 있던 내게 저렇게 물으셨다. 그때마다 햄버거 중에 불고기 버거를 제일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이모는 맥도널드 불고기 버거 하나를 쑥 내미셨다. 그러면 나는 잠시 빗자루를 내려놓고 카운터에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 고향엔 맥도널드가 없고 롯데리아만 있었는데, 그 롯데리아를 갈 일이 있으면 사 먹었던 것이 불고기버거였다. 어이없게도 맥주집 카운터에서 느낄 수 있는 고향의 맛이었다. 그런 날은 믹스커피를 타마셔도 속이 쓰리지 않았다.
고향의 맛뿐만이 아니었다. 이모는 고시원에 혼자 살던 내가 선풍기가 없다고 하면 선풍기를 빌려주셨고, 겨울 이불이 없다고 하면 이불을 가져다주셨다.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고 사장도 퇴근한 새벽엔 가끔 안주로 나가는 어묵탕을 끓여 함께 먹었다. 이모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어묵탕 국물을 마시고 있으면 하나도 외롭지 않고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땐 주로 숨 쉴 때마다 외롭고 특별한 일 없으면 무서웠는데도. 대학 생활과 병행하느라 아무리 몸이 축나도 그 호프집에서 3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10할 모두 이모 덕분이었다. 이모는 내가 그만둘 때 사다 드린 연보라색 카라티를 색깔이 너무 예뻐서 어디 나갈 때나 입겠다고 하셨다. 또 내가 그만둔 뒤론, 새로 뽑힌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그렇게나 내 이야기를 했다고 하셨다. 특히나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닌다고 하면 그럴 리가 없는데도 혹시 나를 아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내 시가 실린 학교 신문은 대학가도 아닌 그 호프집 주방에 한참 동안 존재했다.
“아이고, 내는 그때 네가 처음 왔을 때도 다 기억난다.”
지금은 아들 부부네 집 바로 옆 동으로 집을 옮겨 지내고 있다는 이모는 벌써 그때가 십 년 전이라며 한참을 웃으셨다. 좀처럼 어른에게 전화하기를 어려워하는 나도, 이모와 햄버거와 그 외롭지 않았던 시간들이 알고 보니 내 행복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모는 요즘같이 마음 편한 때가 없다고, 건강만 하다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게요, 이모, 우리 엄마도 그렇고, 살만 하면 몸이 고장 나나 봐요, 하면서 웃었다. 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저도 요즘 행복한 것 같아요, 근데 어쩌면 이모랑 같이 호프집에서 일했던 그때도 내내 행복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이 얘기를 하는데 울 일인 것 같아 조금 눈물이 고였다.
어쩌면 나는 내내 행복했던 것 같다. 주로 외롭고 두렵고 힘든 날이 많았으나 행복한 순간은 매일 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카운터에 앉아 불고기 버거를 먹었던 그 순간만큼은 그 햄버거를 먹는 세상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했을 수도 있다. 고시원에 살던 다른 이들보다 나는 선풍기도 있고 겨울 이불도 있으니 행복한 여름이거나 행복한 겨울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나의 행복을 몰라줬던 것, 내가 나를 불쌍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불쌍한 만큼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고, 불행한 만큼 내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버릇처럼 행복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것이구나. 눈을 뜨자마자 마음이 편한 스스로에게 어째서 행복하냐 묻는 바보 같은 짓을 지난 시간 동안 내내, 지겹도록 해왔구나. 행복은 인정하는 순간부터 행복인가 보다. 행복하면 좋은 거지 질리게도 많은 걸 늘어놓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괜히 내가 아직도 스스로에게 갇혀있는 건 아닐까 두려워져서 이런 말을 해 본다. 하지만 분명 세상엔 이런 사람이 있다. 어째서 행복하냐는 것부터 언제부터 행복하냐는 것을 거쳐 행복한 것을 인정해야겠다고 이제야 생각하게 되는 사람. 그 인정을 위해 과거를 통째로 회상해보는 용기가 필요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