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길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작가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엔 이반 일리치가 죽은 후의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후에 그가 죽기 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나오는 방식으로 시점을 도치시켜 독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에 대해서 느끼고 사유하게 한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또한, 주인공 이반 일리치와 같은 삶은 어떠한 죽음을 남기고 어떠한 상황을 남기는지 독자가 간접경험 할 수 있도록 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소수의 인원도 진정으로 슬퍼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긴 한다. 모두들 그의 죽음이 불러오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 돈 등을 걱정하였다. 동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자리 이동이나 승진. 그리고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부인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사망 지원금이었다.
작가는 이것을 주인공의 잘못된 삶 때문이라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는 주인공의 소원한 부부관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과 부자들을 따라 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주인공이 가족과의 시간을 줄여나가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며 이 같이 잘못된 행동이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과 이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요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의 무관심이 이반 일리치의 잘못일까? 그가 만약 모두에게 그리고 가정에게 정성을 다했다면,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을까? 꼭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 예능에서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유행하였을 때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 깊이 공감을 하였을 것이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처지를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다. 인간의 본질이 이러하다는 것을 부정하며 성인군자의 예시를 들어가면서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하고 싶진 않다. 인간의 본성은 이러하되 노력을 통해서 이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라면 ‘이타성’도 대단할 게 없는 개념이 될 것이다. 인간은 원래 이타적 이니까.
마지막에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용서하오’라는 말을 제대로 전달하진 못했지만 그는 스스로 기쁨에 휩싸여서 죽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은 것이다. 여기서 각 독자의 죽음에 대한 관점에 의하여 주인공이 느끼는 기쁨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이 자신이 하고 싶은, 또는 해야 하는 것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는 것이므로 안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가선다면 이반 일리치의 기쁨은 가치가 있다. 본인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걸 이루어냈으니까. 그러나, 죽음으로서 당사자의 인생은 끝나버렸지만 주변인들이 슬픔을 느끼기 때문에 죽음은 나쁜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의 기쁨은 가치가 없었다. 본인만 행복했다. 심지어 마지막 말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톨스토이의 글은 명확했다. 말하고 싶은 바가 분명하여 의도파악이 쉬웠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담아낸 이야기는 진중했고 한 문장 한 문장 사유의 소재를 던져주었다. 강한 몰입감에 중반 이후로는 숨을 참고 읽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살다가 죽는다. 그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톨스토이에게 큰 감사를 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