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랑 둘이 살게 되면서 부쩍 느끼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생활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데에만도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잘하게 해야 할 일들이 빈틈없이 늘어져 있고 그것들을 놀랍게도 안 하면 안한 티가 나는데 하면 한 대로 아무 티가 안 나기도 한다.
우리 두 사람의 공간을 꾸려나가는 걸 생각하면 대부분의 그 사소하고 잡다하며 매일 반복되는 일들을 꼬박꼬박 하게 된다. 빨래를 돌리고 바닥을 청소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일들은 끝이 없다. 그러다 보면 나도 사람인지라 그 반복되는 일들이 싫증이 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매일 엄청난 출퇴근을 견디며 일상을 지내는 남편의 고단함이 떠오른다. 불평 한 번 없이 묵묵히 우리의 삶을 위해 각자의 무게를 버티는 남편을 떠올리면 출퇴근이 비교적 더 편하고, 퇴근이 빠른 내가 집안일을 더 하는 상황마저도 납득하게 된달까. 당장의 집안일이 불러일으키는 짜증보다도 상대의 고단함이 더 크고 안쓰럽게 느껴지는 일은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비록 아무 티가 안 난다고 해도 집안일을 해내고 나면 어딘가 우리의 공간이 조금은 더 나아져있다는 걸 나만은 아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릴없이 건조기에서 막 나온, 뜨끈한 빨래들을 접고 있다보면 나의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내가 엄마를 만나게 된 뒤로 단 한번도 일을 쉰 적이 없는 워킹맘이었다. 생각해보면 애가 셋인데, 직장도 다니면서 그 모든 집안일을 해내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버거울 일이다.
엄마는 나보다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고 내 나이쯤엔 벌써 애가 둘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집안일은 별 큰일없이 집안이 굴러가면서도 늘 어딘가는 이런저런 빈틈이 있었다. 엄마는 빨래의 작은 오염이나 구김같은 일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빨래에서 냄새가 나는 일도 잦았다. 요리를 싫어했고 늘 마지못해 했다. 나는 언제나 그런 일을 신경쓰는 모난 돌같은 자식이었다.
엄마는 그런 모난 돌같은 자식에게 언제나 서운함을 털어놓았다. '내가 노비냐, 일하는 아줌마냐' 하는 불평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엄마는 집에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일들을 가치없는 일이라고 여겼고, 그런 것을 해야 하는 자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남편을 향한 불만인지, 자식을 향한 불만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엄마는 늘 그 불평을 달고 살았다. 집에 남아있는 그 누구도 엄마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엄마의 그 모든 말과 행동들은 모난 돌멩이같은 자식에겐 언제나 상처로 다가왔다. 엄마는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겐 상처라는 걸 알았을까. 내 생각엔 그걸 알았어도 그녀의 말이나 행동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것들을 불행하게 생각했다. 엄마에게 불행인 것만 같은 나의 존재를, '내가 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치더라도 자식이 구겨진 옷을 입고 나간다고 해도 개의치 않는 엄마를, 기쁨과 사랑으로 차린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내민 음식을 먹는 자식이 된 입장을.
그래서 다시 빨래를 접고 있던 오늘의 나로 돌아오면 나는 그 때의 엄마처럼 불행하지 않다. 남편과 나 두 사람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하는 이 모든 일들을 기꺼이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옷을 개고 내가 먹을 것이 아닌데도 신나서 음식을 요리하는 일이 나는 기쁘다. 나도 더 나이를 먹으면 이 처지를 비관하게 될까. 우리를 위한 모든 일들이 하기 싫어서 발버둥을 치거나 혹은 내가 마치 노비가 된것 같다며 비관하게 될까. 생각만해도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다.
오늘의 나를 생각하면서 그 떄의 엄마를 돌아보면 엄마는 과연 나를 사랑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런 의문까지는 구태여 답을 얻을 필요는 없다.
그저, 내 또래의 그녀가 버거웠으리라고 여기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