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모든 날들은
나를 나쁜 길로 데려가지 않을거야
위기가 온 것 같은 순간, 불안이 감돌면 늘 같은 말을 되뇌었다. 내가 살아온 지난 모든 날들은 결코 나를 나쁜 길로 데려가지 않을거라고. 누가 보면 오그라든다고 말할지언정 내게는 마법의 주문같은 것이었다. 지난 날부터 오늘에 이르러, 미래의 어느 순간에 서있을 나까지도 모두 믿어야만 가능한 말이다.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는 손해를 감수하고도 부동산 계약서를 쓰기로 했다. 이 계약을 깨는 것보다는 손해를 감수하는 쪽이 낫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기도 했다. 받아들이기 싫지만 나조차도 그것을 안다. 집을, 그것도 첫번째 집을 이렇게 울며 겨자먹기로 사는게 어디있나 싶기도 했다.
새벽 세시면 눈이 떠졌다. 가만 있다가도 부동산 생각을 하면 심장이 쿵쾅거려서 잠이 안 왔다. 심장이 뛰는 것이 이토록 부정적일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생전 처음 느끼는 일이었다. 내 마음이 불안할 때는 남편의 심장소리도 꼭그렇게 느껴졌다. 그의 심장은 평온하게 잘 뛰고 있는데 내 마음이 그런 것이었을까 혹은 이런 나를 안아주는 그 사람도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물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동안은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제대로 할 수 없는 그 모습에도 화가 치밀었다. 집도 엉망이고 회사에서도 엉망인 것만 같았다. 모두가 그 엉망임을 눈치챌 수 없도록 묵묵히 내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안에 더이상 머무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해야만 한다고,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할 만큼의 의욕은 없고, 머리를 쓸 만큼은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집안일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꼭 우직한 황소라도 된 것처럼 일했다. 아침에 눈을 일찍 뜨면 일찍 뜨는 대로, 밤에 잠이 안 오면 잠이 안 오는대로. 퇴근을 일찍해 남편이 오는 시간까지 시간이 비면 비는대로. 시간이 되는 대로, 닥치는 대로 집을 보듬기로 했다. 여기저기 내팽개친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몇 번이고 빨래를 나눠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렸다. 건조기를 돌리고 나면 따끈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빨래들을 몇 번이고 갰다. 부엌의 그릇들을 몇 번씩 닦고 정리했다. 싱크대 안쪽까지 박박 닦아댔다. 가스렌지를 닦고 에어프라이어를 닦고 커피머신을 정리했다. 하면 할수록 몸이 고단했지만 끝없이 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괴롭다면서 모르는 척 하고 지냈던 침대 시트며, 베갯잎을 모두 갈아끼웠다. 판판하게 주름잡힌 것 없이 침대를 정리하고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의, 가장 좋아하는 향의 룸스프레이를 뿌리고 베딩 스프레이도 뿌려댔다. 드디어 맨 발바닥이 닿기만 해도 매끄럽고 보송보송한 바닥에, 주름하나 없는 침대, 기분좋은 향, 내가 원하는 불빛까지 방 안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침대 맡에 매달아둔 닐스 보어의 원자 모형 모빌이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 방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했었지.
냉장고 속에 오래도록 박혀있던 식재료를 정리하고 멀쩡한 것들을 꺼내 만들 수 있는 요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필러로 당근 껍질을 벗기고 당근을 커다란 볼 하나 가득 채썰었다. 보통은 당근 라페를 만들려면 귀찮아서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데 당장 죽겠으니 큰 마음이고 뭐고 일단 하면 되는 일이었다. 늘 온 몸이 지치도록 일을 만들어서 했고 집안일은 그러기에 좋은 주제였다. 아무리 움직여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무언가를 하고, 또 하고 그러다가 지쳐서 아 이젠 못하겠다 싶을 때쯤 자연스럽게 관두면 그만이었다. 다시 불안하게 심장이 요동치면 일어나서 무엇이라도 하면 되었다.
불안의 늪을 건너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도 있다는 걸 온 몸으로 확인해야 했다. 불안할 수록 몸을 움직였고 그럴수록 집은 깨끗해졌다. 나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에 두고자 하는 것은 성공한 셈이었다. 집을 사는 일이 마무리된다면 이 불안에서 벗어나 다시 느긋하고 나른한 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모든 날들이 나를 결코 나쁜 길로 향하게 하지 않을거라는 그 말을 오늘도 혼자 수없이 되뇌였다. 분명히 그럴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