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의 평생을 잠옷 없이 살았다. 밖에 나가서 입기는 애매해진 옷들을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대로 잠옷으로 입곤 했다. 더 이상 밖에 입고 나가긴 어색한 핑크색 티라던가 혹은 어느 단체에서 받았던 티라던가 그런것들을 입었다. 그런 애매한 옷들은 늘 집에 생기기 마련이었고 늘 서랍 한 켠에는 그것들이 쌓여 있었다. 밖에 나갔다 돌아와서 씻고 나면 옷장의 한 켠을 뒤적여서 그날 그날 손에 잡히는 옷을 입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다가 세상엔 잠옷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그런 걸 진짜 입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서른도 훨씬 넘어서였다. 가까이 사는 사촌네 집에 놀러갔다가 간만에 사촌과 더 놀고 싶어서 자고 가기로 했던 날이었다. 사촌 동생이 내게 가져다 준 것은 네이비 색 파자마 한벌이었다.
잠옷같은 건 없어도 된다며 아무거나 입고 자도 된다며 손사래를 치는 내게 사촌동생은 꼭 잠옷 입고 자라고, 입은 것과 안 입은 것이 아주 다르다고 일장 연설을 했다. 보통 강력하게 자기 주장을 말하지 않는 애라고 생각했는데 퍽이나 잠옷이 마음에 드나보다 싶었다. 그 애의 잠옷이 내가 입어본 첫 번째의 잠옷이었다.
잠옷이라는 건 아주 신기한 것이었다. 애매한 티셔츠나 바지가 잠옷이랑 뭐가 그렇게 다를까 했는데 '전혀 다르다'는 사촌의 말이 맞았다. 괜스레 더 바스락거리고 기분이 좋았다. 이불과 나 사이에 있을 잠옷의 촉감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베개에 머리만 대도 잠들 것 같은 나른하고 포근한 느낌은 잠옷에서부터 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그날로 나도 잠옷을 샀다. 잠옷은 반드시 코튼 100이어야 한다는 사촌동생의 강력한 권유를 받들어 코튼 100의 네이비 색 잠옷을. 그 날 이후로 확실히 달라졌다. 분명히 아주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묘하게 삶의 질이 올라갔달까.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나 혼자는 분명히 알아차릴 만한 변화였다. 게다가 옷장 한 켠에 버리지도 못하고 쌓여 있던 이상한 옷들을 전부 치워버릴 수 있는 건 덤이었다.
씻고 나오면 내 잠옷 한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어 그걸 입는 건 꽤 즐거웠다. 별 것도 아닌, 잘 때만 입는 옷이 한벌 더 있다는게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보드랍고 바사삭거리는 소매로 팔을 집어넣고 단추를 잠그고, 바지를 입으면 맘껏 집에서 굴러다닐 수 있는 복장이 되었다. 집에 갑작스레 누가 와도 크게 이상하지 않고(그 전엔 크게 이상한 옷일 때도 많았다. 옷의 사이즈라거나 옷의 프린트라거나) 휘적휘적 기분도 좋고. 도대체 이걸 난 왜 이제 알았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뒤로는 여러 잠옷을 샀다. 색도 바꿔보고 소재도 바꿔보고 길이도 바꿔보고. 밖에 나가 어디 자랑할 것도 아닌데 여러 잠옷을 돌려가며 입는 건 오히려 아무도 몰라서 더 좋은 나만의 기쁨이었다. 잠옷의 종류가 늘어날 수록 나의 조그만하고 확실한 행복도 늘어갔다. B를 만나게 된 후 가장 처음 B에게 선물했던 것은 잠옷이었다. 나의 이 조그만 행복을 꼭 그와 나누고 싶었다. 사촌동생이 내게 했던 것처럼 꼭 입어보라고, 힘줘서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B도 이렇다할 잠옷 없는 삶을 살아온 건 마찬가지여서 처음 잠옷을 선물받았을 땐 너무나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함께 살게 된 지금은 꼭꼭 잠옷을 잘 챙겨입는다.
주말 오전에 느릿하고 나른하게 쇼파나 침대에 누워있으면 빨간 체크무늬 파자마를 입은 B가 종종종종 바쁘게 돌아다닌다. 주말에만 가질 수 있는 나른한 오전 느낌이 좋다. 햇빛이 쏟아지고 뽀얗고 포근한 냄새가 나는 집, 그리고 그 풍경을 가로지르는 빨간 체크무늬가 사랑스럽다. 오래전 B와 연애하던 시절에 선물한거라 이미 건조기에 몇 번은 돌려서 소매랑 바지 길이가 약간 짤막한데 그 짤막함마저도 어쩐지 우리 행복의 일부인 것 같다. 살짝 올라간 파자마 바지 아래로 그의 발목, 맨발이 드러난다.
주말 오전의 B가 짤막한 빨간 체크무늬 파자마를 입고 집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테이블 앞에 서서 물잔을 들어 물을 마시는 걸 본다. 꼭 빨간 잠옷을 입은 곰돌이 한 마리를 보는 것 같다. 아니, B는 곰보다는 커다란 멍멍이같은 느낌이니까 빨간 잠옷을 입은 커다란 멍멍이로 바꿔야겠다.
매일의 일상에서 행복을 가져다 줄 만한 것들을 부단히 찾지만, 잠옷은 생각도 못한 아이템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데 놀랍게도 확실하다. 그에게 빨간 체크무늬 파자마를 선물한 덕에 기대하지도 않았던 행복의 크기가 더 커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혹시라도 또 선물할 일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또 잠옷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