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 존 스튜어트 밀
긍정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은 삶의 위대한 세 영역으로 ‘사랑’, ‘일’, ‘놀이’를 꼽았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삶은 이 세 가지로 채워지며 이 영역 안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고 한다. 그럼 이 안에서 나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
사랑
사랑의 범위가 연인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동료 까지라면 10점 만점에 5점 정도일 것 같다. 최근에는 관심의 초점이 ‘사람’보다는 ‘일’과 ‘놀이’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소홀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법도 하다.
대신, ‘인류애’로까지 범위를 넓힌다면 8점까지는 올라갈 것 같다. 작지만 전 세계 어린이들을 위해 ‘세이브 더 칠드런’에 매달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뇌사 상태나 죽음에 직면했을 때, 건강한 신체들을 필요한 이들에게 기부하는 ‘장기 기증’ 회원이기도 하다. 덕분에 신분증을 제시할 순간이 오면, 자부심이 무럭무럭 자라는 느낌이 든다.(장기기증 회원들은 신분증에 사고를 당하거나 앞서 말한 상황에 처했을 때 식별을 위한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
일
나는 지금 두 가지의 일을 하고 있다. SW 테스터로서의 일과 작가로서의 일이 그들이다. 전자는 펜대를 잡았을 때부터 꿔왔던 꿈과 같아서 ‘실무’만큼은 무척 보람차고 즐겁다.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공략집 없는 게임처럼 나름 재밌게 헤쳐가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록 인문학과는 정반대인 공돌이면서 글짓기 대회나 공모전 수상경력은 없지만, ‘글쓰기’를 생업으로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 출판사와 미팅을 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은 여전히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들은 유시민 작가가 말한 ‘행복한 삶’에 부합한다. 결과물을 하나씩 만들어내면서 힘들지만 재밌고, 좌절스럽지만 보람찬 경험들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놀이
‘글쓰기’와 ‘책 읽기’는 패시브 취미가 됐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좀이 쑤신다. 조금이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허전하다. 잘 써지는 날이나 잘 읽히는 날에는 기분이 좋고, 안 써지는 날과 안 읽히는 날이면 울적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쓴다. 책을 읽으며 좋은 글들을 수집하고, 인생에 적용해본다. 그렇게 나 자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는다.
지난 날에도 놀이 부문 만큼은 '해보고 싶으면 해보자!'란 태도로 살아왔다. 클라이밍, 등산, 일렉기타, 노래, 모임, 무전여행, 불멍, 물멍 등등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면 일단 해봤다. 이런 경험들은 앞으로도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쌓일 것이고, 소위 말하는 '썰'들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사랑, 일, 놀이 세 영역에 대해서 나름의 삶의 가치를 살펴본 결과는 ‘나름 가치 있다’는 것이다. 삶이 쳇바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에 비하면 비교적 만족도 높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새로운 질문이 있다. 삶이 가치 있다면 곧 죽어도 여한이 없을까?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쉬이 내리기 힘들다. 피상적으로 드는 생각은 ‘아직 못해본 게 많은데!’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하고 소망하지 않을까란 생각도 든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보자. 만약 죽음이 없다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롭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영생은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의미를 말살한다. 영원히 산다면 오늘 만난 사람들, 그들과 나눈 대화와 교감, 함께한 일들이 의미가 없어질 것만 같다.” - <어떻게 살 것인가> 중에서
유시민 작가는 ‘영생’ 때문에 우리가 잃게 될 것에 대해 걱정한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바로 ‘삶의 의미’다. 넘쳐나는 시간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오늘 소중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내일 만나면 된다. 오늘 못한 일은 내일 끝내면 된다. 심지어 오늘 실수를 하더라도 내일 다시 보완하면 된다. 그리고 다시 고쳐낼 시간은 영원히 충분하다.
시간이 영원한 삶이 과연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을까? 단편적으로 ‘사람을 돕는다’는 관점에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는 순전히 ‘타인’에게 초점 맞춰진 것이다. ‘나’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기회의 희소성’이 사라진다. 어찌 보면 나중에 못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해야만 하는 소중함은 삶의 가치를 더해주는 요인인 것 같다. 나중에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지금 만나야 하는 간절함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영원한 시간은 이러한 소중함과 간절함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살포시 던져본다.
“지는 해가 만드는 낙조는 일출만큼 눈부시지 않다. 하지만 아름다움으로 치면 낙조가 일출을 능가할 수 있다.” - 유시민 작가, <어떻게 살 것인가> 중에서
앞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가치 있다는 말이 된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지나더라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이를 위해 글을 남겨대고 있다. 사실 내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세 영역에서 보던, 한 영역에서 보던,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보든 간에 상관없이, 남이 제시해줄 수 없는 것 같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을 ‘보람’ 있다고, ‘가치’ 있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내일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하나하나 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