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과 한계는 한 끗 차이

by 금교준

성공과 실패를 규정짓는 건 나다.


내겐 명확한 목표가 있다. 언젠가 나만의 센터를 운영하겠다는 목표. 심지어 3층짜리 건물에 각 층별로 어떤 분위기를 풍기고, 어떤 업종을 운영할지까지 대략적으로 구상해놓은 상태다. 여기에 더해 나름 치밀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점이 있다. 바로 심리학, 글, 모임 등등 다양한 측면을 초병렬적으로 공부하고 쓰며 준비해 가고 있다는 부분이다. 그리고 오늘 그 자부심과 목표 모두 나 스스로를 한계 짓고 있던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합일 의식’ 또는 ‘지고의 본성’이야말로 모든 지각 있는 존재의 본질이자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를 한계 짓고 여러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 켄 윌버, <무경계> 중에서


이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켄 윌버는 우리 스스로가 세상과 나에 대해 정신적인 경계를 긋는다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서, ‘나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야.’ ‘나는 저 사람과 달라.’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경계선이 된다. 나를 ‘열심히 사는 것’이나 ‘다른 존재’로 규정지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나라는 사람을 어느 하나의 좁은 존재로 가치를 좁혀 버린다는 점이다. 전 우주적으로 보면 아주 사소한 작은 존재로 확정시켜 버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불교, 기독교, 철학에서는 진리의 끝에 다다르면 '나는 곧 세계요, 세계는 곧 나다'라는 걸 알게 된다고 한다. 혹시 나는 스스로를 작게 좁혀버리는 경계를 긋고서는 '고통'을 합리화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던 건 아닐까? 이를 피로를 쌓게 만드는 일들로 대신 덮어버리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닌가? 그래서 휴식조차 편히 쉬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가둬버리는 것이다.)


최근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말들도 이와 비슷하다. ‘성공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저축과 투자를 해야 해요!’ 등등… 시작부터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고, 마치 성공은 좋은 것이고 실패는 안 좋은 것으로 규정지어 버린다. 대체 그들이 말하는 성공이 뭘까? 청춘과 같은 자기 시간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돈을 많이 버는 것? 가까운 친구들은 모두 잃고,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명성을 얻는 것? 성공하면 어떻고, 실패하면 어떻다는 건지.. 사실 성공과 실패의 기준도 내가 만드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주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내가 행복하면 성공인 건데 말이다. 잠깐, 실패해도 행복을 느낀다면 성공이 아닌가?


알고 보면 고통 덕분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비되는 배경과의 관계없이는 어떤 대상도, 어떤 사건도, 어떤 형태도 결코 인식할 수 없다. - 켄 윌버, <무경계> 중에서


우리가 경계선을 긋는 것 중에는 흔히 고통과 행복이 있다. 고통으로는 온갖 스트레스, 정신적 소외, 육체적 핍박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럼 행복으론 뭐가 떠오르는가? 혹시 ‘스트레스 없는 삶’ ‘사람들과 하하호호 소통하는 삶’ ‘더울 때 시원하고, 추울 때 따뜻할 수 있는 삶’ ‘건강한 삶’ 등이 떠오르진 않는가? 잘 생각해보면 행복은 따로 정의되는 게 아니다. 바로 ‘고통 없는 삶’이 곧 행복이다. 한 마디로 고통과 행복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 상호보완적인 존재다. 정말 힘든 일을 겪은 후에 즐거움이 찾아오는 건 이런 이치다.


나쁜 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 좋은 것들만 남겨두는 것은 사실상 뜬구름에 가깝다.


세상에는 온갖 반대되는 것들이 가득하다. 얼마 전 글에서도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선’이 있으면 ‘악’이 존재한다. 분자를 이루는 원자가 두 개 있을 때, 두 원자의 스핀은 서로 반대 방향을 띤다. 즉, 어느 하나가 존재하면 반드시 반대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 참고 링크 : https://brunch.co.kr/@rywns741/80


오목볼록면.JPG

* 출처 : <무경계>


이에 더해 켄 윌버 작가는 반대하는 존재의 예로 하나의 선을 예로 들었다. ‘볼록면’과 ‘오목면’이다. 위 그림을 보면, 가운데 그어져 있는 선을 기준으로 두 면이 나뉜다. 선은 두 면을 동시에 인식 가능하도록 만들어낸다. 즉, 선이 있으면 둘 다 있고, 없으면 둘 다 없다.


이는 세상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어느 하나만 사라지게 할 순 없다는 사실을 일러 준다. 고통이 사라지면 우리는 더 이상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왜? 항상 즐거우면 우리는 그게 즐거운 일인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트레스가 없다면 우린 그게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은 상태인지를 모른다. 때문에 그게 행복한 건지를 알 수 없다.


나쁜 걸 없앨 수 없다면, 좋은 게 올 거란 생각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사회생활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그대로 적용된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지금 이 직장이 내가 느끼기엔 가장 힘들다. 그러나 이 고통은 더 짓궂고 더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느껴지는 거다. 즉, 우리는 어느 누군가에게는 행복할 만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군대에서 돌고 도는 말 중에 ‘내가 배정받은 자대가 가장 힘들다.’라는 말.


양극이 실은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불화는 조화로 녹아들고, 투쟁은 춤이 되며, 오랜 숙적은 연인이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주의 절반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과 친구가 된 자리에 있게 된다. - 켄 윌버, <무경계> 중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벗어나고 싶다면 되려 스스로가 규정 지어놓은 고통과 행복의 경계선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인정한다는 건 경계를 허물고, 이어 깨달음의 길로 한 걸음 내딛는 첫 단추가 된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그럼 잿빛 같던 세상도 노란색, 분홍색, 혹은 하늘색으로 변색되진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고통을 견디면, 더 즐거운 시간들이 찾아올 거야.’
‘지금 나를 괴롭게 만드는 저 상사가 가면,
나를 기쁘게 만드는 상사를 만나게 될 거야.’
‘지금 내가 떨어진 이 회사보다 복지 좋고, 급여도 좋은 회사가
나를 알아보고 합격시켜줄 거야.’


* 참고 : 마음속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는 진리는 예수, 부처 둘 다 동일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궁금하다면, 책 <무경계>를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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