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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Oct 30. 2020

자유, 진정한 존엄의 길

“자유란 자기 욕망에 빠지거나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의 욕망과는 다른 부자유이다. 다시 말해 욕망에 휩싸이지 않고 인간의 본질로 살고자 하는 자유로운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당신은 자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욕망의 실현? 쾌락의 취득 수단? 통제의 부재? 이런 어려운 단어들이 아니더라도 각자 생각하는 ‘자유’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다. 근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자유를 ‘존엄’의 필수 조건으로 정의했다.(당대 주목받은 철학자라서 그런지 생각의 초점부터 다른 걸 보라! 사실은 전자와 후자의 순서가 반대이겠지만)


존엄이란 단어는 라틴어 ‘디그니타스 dignitas’로부터 유래됐다. 이는 ‘존경’이나 ‘고귀함’을 의미하는 데, 존엄을 죽음, 생명, 삶 등과 연관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부터 스스로를 다른 존재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던 우리 조상들은 우리의 생명 자체에 존경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엄성을 부여했던 것이다.

 

평가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살면서 타인과 관계하며  수밖에 없다. 가족, 학교, 직장 어디서든 혼자만   있는  없기 때문이다. 혼자 사색하고, 혼자 공부하고, 혼자  쓰는 작가조차 타인의 글이나 생각을 통해 영감을 얻어야 한다. 타인이 조사한 통계 자료나 연구 결과들은 사색의 증거물이 되어 힘을 더해준다. 이처럼 우리는 타인과 관계해야만 하는 사회적인 동물이다.(증인 : 아리스토텔레스)


존경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엄성을 지닌 존재는 가치를 평가받을 수 없다. 나는 이를 ‘평가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하고 싶다. 즉, 우리들 각자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가치를 평가받는 것은 부당한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이나 타인을 평가한다. 어떤 이는 타인보다 유복하고 능력 있어 보이는 자신을 보며 우월감을 느낀다. 자신보다 유명하거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는 각자 추구하는 목표를 기준으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는데, 칸트는 이러한 목표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목표로 삼은 ‘돈’이 상대의 목표가 아닐 수 있음을, 내 목표가 ‘여유’여도 상대에게는 ‘바쁨’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면 평가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 이는 ‘저 사람은 저렇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거야!’란 비교의 생각을 벗을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강요로부터의 자유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자연법칙처럼 모두에게 통용되는 원칙이 되어도 좋은지 스스로에게 묻고 나서 행동하라!” - 칸트, <순수이성비판>


우리는 누군가에게 강요를 받으며 살아간다. 가족으로부터 ‘공부’의 강요를, 사회로부터 ‘경쟁’의 강요를, 자신으로부터 ‘성공’의 강요를 받는 걸 생각해보라. 그러나 행위는 강요되어선 안된다.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행위야 말로 진정한 보람과 감사함을 일으킬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이는 자신에게 질문 하나를 던짐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무언가 행동하기 전에 ‘보편적인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골목 깊숙이 있는 허름하고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옆 테이블의 사람이 급히 전화를 받으며 뛰쳐나간다. 그런데 이거 웬 걸? 지갑을 두고 갔다. 찾아주려고 보니 안에 수백만 원이 들어있다. 마침 목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칸트가 말한 질문을 던져보면 된다. 이 돈을 취한다면? 내가 나중에 동일한 일을 겪었을 때 다른 사람이 돈을 모두 취하더라도 괜찮은가? 내 가족이 같은 일을 겪더라도 좋은가? 이를 생각해보면 온전히 찾아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하자. 다른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데 나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강제로 학원을 등록했다. 아이는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오로지 ‘공부의 삶’에 갇힌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회사에 다니고, 상사에게 깨지고, 일에 치이며 힘들어한다. 그리고 이는 나도 겪은 일들이라고 해보자. 과연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을까? 단지 ‘모두가 겪는 일이니까 네가 좀 참아!’하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인내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 과연 이 강요가 정당할까?


이는 한국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공부하고, 취업했더니 직장에서는 자신을 ‘온실 속의 화초’라고 부른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위로 한마디는 못 해줄망정 고통만 더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성취했을 때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나중에 행복해질 수 있다는 강요에 순응했더니 고통만 얻게 된다면 어떨까?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취업이 안 된다면 어떨까? 아무리 부모라도 자신이 걸은 길을 아이에게 강요해선 안된다. 아이에겐 아이만의 행복이 있고, 아이만의 길이 있다.


수단으로부터의 자유

 

“너 자신을, 또 타인을 단순히 도구나 노예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서로 사용하고 사용되면서, 또 동시에 언제나 나와 타인의 인격을 존경하고, 인간답게 대우하고, 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우리는 지속적으로 타인과 공동생활을 하며 서로 관계한다.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받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 그런데 간혹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은 내가 힘들 때마다 나를 위로해야 해’, ‘이 사람을 도와주면 내가 착한 사람이 되겠지?’ 등과 같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이는 잘못됐다. 사람은 다루는 것이 아니라 대해야 한다.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상대방이 내게 뭔가 해줘야 한다고 당연시하는 마음을 끊어내면 된다. 아무리 내가 힘들더라도 상대방이 나를 위로해줄 의무는 없다. 대신 힘들다고 말할 수는 있다. 상대가 정말 나를 소중히 생각한다면, 힘들다고 말하는 나를 위로해줄 것이다. 또는 사람을 돕는 일은 명성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기 위해 돕는 것이다. 이 차이를 명확히 알면 수단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자신의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은 죽는다. 그리고 인간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자살’. 현대 사람들은 ‘자살’을 해서는 안될 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살’이라는 게 부정적이기만 한 걸까?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해서?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 데 사용하질 않아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면 휠체어를 타든 목발을 짚든 지팡이를 짚든 간에 그 삶은 언제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사라지면, 그래서 그것을 이성으로 깨닫게 되면 그때가 죽을 때인 거지요.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려면 진정으로 인간과 삶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하고 선의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라몬 삼페드로, <죽음은 내게 주어진 마지막 자유였다>


라몬 삼페드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에 사고를 겪어 일곱 번째 경추가 부러졌다. 이 때문에 30년 동안 침대에서 타인이 돌봐주는 생활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다 그는 말한다. 지금의 삶이 진정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스스로 밥을 먹고, 스스로 씻고, 스스로 일을 할 수 없는 삶.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자처한다. 그런 그에게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가족을 위해 자신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감수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를 보면 삶의 의미가 없을 때 죽음을 선택하는 것 또한 일종의 ‘권리’라는 생각이 든다.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빅터 프랭클은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며 고찰했다. 그에 따르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가 되는 시간 동안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삶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당시의 수감자들은 성탄절이 되면 전쟁이 끝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삶의 희망인 성탄절이 지나고도 끝나지 않자, 절망감은 그들로 하여금 죽음을 택하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삶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몬도 그렇고, 수용소의 사람들도 그렇고 지금 당장의 순간이 죽음보다 고통스러울 때,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권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용소에서의 죽음이 안타깝다..)

 

지금까지 가져왔던 수많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자

 

“자유의지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임을 인식하면서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그 삶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밀고 나가는 정신의 태도와 능력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당신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자유를 통제하고 있는가? 타인의 자유까지 쥐락펴락하려는 건 아닌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나는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존중은 존엄의 이해로부터, 자유의 이해로부터 나온다. 또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되려 ‘존중’을 해야 한다.


평가, 강요, 수단, 죽음 등 우리가 자유함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초점들은 많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함으로써, 사랑함으로써, 이해함으로써 자신에게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를 선물해주는 건 어떨까? 그렇게 스스로의 존엄성을 구축하고 타인의 존엄을 인식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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