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엄마가 두 명이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와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의 어머니이신 할머니. 그렇게 두 분이서 나의 엄마가 되어 주셨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기에 만들어진 결과였다. 공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생 때 나는 할머니에게 참 모진 손주였다. 툭하면 삐치고 툭하면 소리치며 땡깡부렸기 때문이다.(사뭇 용기 내어 꺼내보는 흑역사.. 부끄러워진다.) 어릴 때부터 잘 먹어야 쑥쑥 큰다면서 강원도식 교통카드로 만든 감자조림과 할머니의 특급 애정이 담긴 고봉밥이 차려졌었다.(우리 할머니는 강원도 사람이시다.) 그중에서도 나름 가장 심각한 고민 중 하나였던 건 매번 똑같이 나오는 된장찌개였다. 그 특유의 구수한 냄새와 달짝지근한 맛은 그 나이 때엔 낯설기 때문이리라 변명해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 감사해하진 못할망정 삐쳤었던 게 참.. 그럼에도 손주사랑에 일색이었던 할머니가 새삼스레 존경스러워진다.
나름 어른이 됐다고 자부했던 작년, 스물다섯의 나는 혼자 돈도 벌고, 독립도 했다. 막상 나와보니까 현실은 온갖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라는 게 와 닿았다. 직장상사의 빗발치는 호통과 인격모독은 그 어떤 총탄보다 강렬했기에… 혼자 텅 빈 사무실 한편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니까. 덕분인지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달아서일까 평소엔 먼저 카톡도 잘 안 보냈던 아빠, 엄마에게 뻔질나게 전화했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증거로 들이밀 건 충분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아직 철 안 든 어린애였다. 정작 직접 키워주신 할머니에게는 전화 한 통 쉬이 하지 않았으니까.
정말 이기적 이게도 할머니께서 차려주신 밥상만은 그리워했다.(이 때는 우리 부모님 집과는 먼 강원도 정선에 계셨다.) 감자조림 한 접시, 고봉밥 한 사발, 된장찌개 한 그릇. 희한하게도 밖에서 사 먹거나 엄마가 해주거나, 심지어 내가 직접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할머니의 손맛은 절대 안 나왔다. 어떻게 하신 거지? 특히 내가 만들면 입 안에서 온갖 MSG들이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맛은 있었지만..
어쨌든 그랬던 작년에는 내 인생의 히트 사건이 하나 탄생했다. 내 이름으로 시집이 한 권 출간되었다는 거다. 그리고 하나의 사람 만나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이름하야 ‘시집 전달기’. 5월 초여름에 나온 나의 시집은 다음 해 1월 겨울까지 거의 300명에 해당하는 나의 사람들에게 전달됐다. 정말 정말 중요한 건 엄마, 아빠, 형제, 몇몇 친척, 친구들, 모임 사람들 등등에게 다 전달해줬는데, 정작 우리 할머니한테는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원도 정선에서 지내고 계시던 할머니에게 책을 주리라 마음먹은 횟수를 m단위로 환산해보자면 가히 지구를 세 바퀴는 두르고도 남을 거다. 나름의 변명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드리지 않았다. 이유는 정말 어이없게도 ‘다음에 더 좋은 책을 써서 성공한 후에 같이 드리자!’라는 생각 때문에.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3월. 평소 바빠서 연락이 잘 없던 쌍둥이에게 긴 카톡이 날아왔다.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대.. 오늘 새벽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니까 청원휴가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급하게 전화를 들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이미 눈물에 젖어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 단단히 준비해도라는 당부였다. 그때부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직장에 청원휴가를 부탁하는 것과 ‘정말 마지막일까?’라는 생각뿐이었다. 갑자기 1월의 어느 한 날이 떠올랐다.
1월의 어느 주말, 오랜만에 우리 할머니가 부모님 네로 오셨었다. 아쉬웠던 건 하필 부대로 복귀해야 하는 일요일이기도 했고, 일찍 내려가서 일도 잠깐 봐야 하는 날이었다. 어김없이 짐을 챙겨 할머니를 꼭 안고 인사를 드렸다. (우리 집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 포옹을 한다. 이 습관은 낯부끄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효과가 좋다. 자존감이 올라가서!)
“할머니~ 먼저 내려가 볼게요! 설날에 볼 수 있는 거죠?”
원래는 소파에 앉은 채 잘 다녀오라고, 멀리 안 나간다며 손 흔들어 주시던 할머니께서 그날만큼은 배웅을 나오셨다. 차에 짐을 싣고 타려는데 우리 할머니가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우리 손주가 이렇게 컸었나? 이제 혼자 살아도 되겠네! 죽어도 걱정이 없겠네 없겠어~”
평소 같았으면 장난처럼 느껴졌을 텐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할머니의 두 손이 그날따라 유독 차가웠다. 본래 수족냉증이시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이 찬 손을 잡아볼 날이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사실은 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는 거다. 마치 시간이 오래 지나도 떠올리고 싶다는 열망을 잔뜩 품은 것처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작별인사를 하고 액셀을 밟았다. 그날의 액셀은 마치 5톤 트럭의 그것처럼 무거웠다.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왜 비 오는 날 하는 운전이 위험한지 체감할 수 있었다.
새벽 3시 30분. 전화를 한 통 받는다. 할머니의 소천 소식이었다. 우리 가족은 가벼운 한 마디조차 서로에게 건네지 않고 조용히 약속 장소로 모였다. 서로 마음 정리를 할 수 있게끔 한 나름의 배려였으리라. 할머니는 요양원에 계셨는데, 코로나라는 악독한 바이러스 때문에 임종 순간마저도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임종 순간 할머니와 있었던 건 몇몇 직원분들과 큰 외숙모뿐이었다.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외롭게 소천하셨다.
장례식장에서의 3일 동안 3년 동안 흘릴 눈물을 다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께서 자주 해주시던 감자조림 한 접시, 고봉밥 한 사발, 된장찌개 한 그릇이 자꾸 생각나버려서. 할머니께 내 시들을 보여드리지 않은 것이 원망스러웠다. 그냥 손주의 글 읽어주기만 해도 좋아하셨을 텐데, 그래도 행복해하셨을 건데. 여전히 철없는 어린아이의 용기 없는 욕심은 그렇게 후회를 머금은 채 할머니를 떠나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