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이렇게 시작된다. 빈티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책상, 브라운 계열의 소파, 천축이나 구식 자명종 같은 골동품이 하나씩 놓인 원목의 사각 책장, 패션 잡지를 훑는 러시아인, 연애담을 나누는 다소 어색한 기류의 남녀... 그러니까 절기에 맞는 옷을 입고, 바깥공기를 마신 후 내 심박수와 비슷한 음악이 나오는 카페에 앉는 순간부터 그날이 온전하게 실감되는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 그 말은 원래 없던 것처럼 여겨지는 어떤 날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의미했다.
수증기가 되어 사라진 물의 높이처럼 영 기억나지 않는 시기를 생각한다. 홍콩을 배경으로 한 어떤 영화에선 사랑을 상실한 남자의 이야기가 상영된다던 목소리가 있었지. 그녀와 한동안 같이 살았단 사실도,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도 어디 한 군데쯤 모난 곳이 있단 사실도, 죽고 못 살 것 같던 감정도 언젠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단 사실도. 그녀 덕에 알았다. 또 기억나는 거라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이 눈물로 점철된 표정이었다는 것 정도. 뭔갈 잃고 나면 그 이외의 것들이 시선에 잡히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 덕분에 그녀가 말했던 영화 주인공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녀가 애용하던 책상 위엔 몇 줄의 편지만 남아있었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는 며칠이 그 편지로 변태한 거라고 짐작한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에서 한 번. 미안한 일이 더 많네요. 에서 또 한 번. 철 지난 폭우가 내려 홍수가 난 건지 도통 읽을 수 없었던 문장들을 어렴풋이 떠올린다. 그때를 복기하면 눈을 따갑게 하려면 뭔갈 잃게 만들면 된다, 는 말이 머릿속을 굴러다닌다.
그리고 나는 잃어버린 문장 속에서 며칠 살았던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