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팝송을 틀어두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특히 지금처럼 보행자 작동 신호등을 켜지 않은 채로 지나가는 차들을 한 대... 두 대... 쳐다보고 있을 때만큼은. 하얗게 도색된 사각형을 양쪽 다리로 번갈아 밟던 그녀가 떠오르려 할 때만큼은. 머릿속을 비우는 일이 낯선 언어와 음의 높낮이가 가세해야만 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귓속을 파고드는 이국의 언어가 이름을 흩뜨리고 다채로운 음계가 기억을 섞는다. 삼원색이 섞이면 흰색이 되는 것처럼.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머릿속이 하얀 백지장처럼 순백이 된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몇 년이 지나도록 예외가 없었고, 지금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어야 했다.
영. 그녀의 이름을 자꾸만 되뇌고 있는 것이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내 지인이 아니고, 내가 아끼는 혹은 좋아하는 축의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시간순으로는 훨씬 앞쪽에서, 감정 골로는 깊고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비상한 일이지. 비상한 일은 일상에서 조짐을 보이게 마련*이라는 말이 미간을 스친다. 오늘따라 옷을 두껍게 겹쳐 입고 싶었던 게 다...
같은 쪽으로 걷던 사람이 신호등을 작동시켰고, 나는 건너지 못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가게 중앙에 바 테이블이 크게 놓여있는 카페였다. 커피는 내리는 사람과 마시는 사람이 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그래서 가볍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구조로 설계했다고 가게 주인은 호기롭게 말했다. 그만의 철학은 확고했다. 그 일환으로 가게 내부에선 커피 향이 그윽하게 풍겼다. 그는 내가 들를 때마다 그녀를 가리키고는 단골손님이라고 했다. 자기가 사람 하난 잘 보는데 참 근사하고 된 사람이라는 말을 거듭했다. 밥이라도 한 번 먹어봐. 한 바퀴 두르면 일곱 사람은 거뜬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높이가 허리까지 오는 의자들을 급매에 처분하던 순간까지 그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젊은 남녀가 혼자 다니면 못써.
자신도 지겹게 들었다고 했었지. 그러니까 그녀와 내가 우연히 마주쳤던, 모른 체하기도 애매해서 어색하게 인사했던 카페에서였다. 우린 그 순간을 복기하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 인연이 이렇게까지 이어질 줄이야. 믿기지 않아. 결국 그 사람이 한 건 했다고 봐야 하나. 썩은 동아줄도 일단은 동아줄이라고 믿었던 시절. 공과사가 명확하지 않던 질풍노도의 시절이었다. 그 시기의 나를 관통하던 것이 치기와 동경일 뿐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지. 그녀가 들어보지 못했던 목소리로 발음했던 마지막 문장이, 그 통화 음성이 여전히 날카롭다, 고 지금도 생각한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활짝 웃던 그녀의 얼굴이 선연하다. 좋아했던 만큼 텅 비어버린 가슴을 실감하는 일이,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그토록 쓰릴 줄 몰랐다.
붉게 발광하는 버튼을 힘껏 눌렀다. 귓속에는 끝소리가 희미한 가사가 울리고 있었다. Don’t you forget about me Don’t you forget about...**
* <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 “Don’t Forget About Me” – Chris Ja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