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만큼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음과 모음을 혀와 잇몸의 움직임으로 발음하고, 그러다 보면 목젖 부근에 턱턱 걸리는 문장이 있기 마련이고, 한때를 바쳤던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하고, 엄지와 검지를 가로질러 전하곤 했던 일련의 감정을 다시금 상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것이 보통 이상으로 소중했거나 각별했다는 의미였으므로. 늘 그렇게 여겨왔으므로. 서투른 발음으로 몇 구절씩 읽는 일을 취미로 삼고 있습니다.
평대에 서서 잠깐 엿본 글이 성대에서 멈칫하면 그 책을 얼른 계산대로 가져가곤 합니다. 얼마 전, 당신이 펼쳐 들었던 책의 제목을 보곤 곰곰이 움직이는 당신의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요 몇 해 동안 인기척 없이 찾아와 놀래켰던 장마를 당신과 또 한 번 볼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쌓일 장마의 기억이 당신을 이어 붙인 채로 머릿속에 차곡차곡 포개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몇 번 곱씹었습니다.
그 계절이 올 때까지는 꽤 많은 사건이 요구될 겁니다. 우리는 함께 눈을 맞아볼 것이고, 찬바람이 부는 바다를 바라볼 것이고, 머리칼이 잔뜩 휩쓸려 시야를 가려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갈 것입니다. 예고 없는 돌부리에 걸려 크게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손을 내밀어 서로를 잡아 일으키고 다시 걸을 것입니다. 작년 장마철에 궂은비를 견디며 걸었던 잔모래의 감촉을 기억합니까. 갯강구의 발소리를 듣고 벌벌 떨며 겨우 한 걸음 내디뎠던 검은 돌무리를 기억합니까. 새파란 바다가 하얀 포말로 깨지면서 풍겼던 짠내음을 기억합니까.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그해 여름의 일입니다.* 그 구절을 반복해서 읊었습니다. 여러 기억에 자꾸 묻히기 때문인지, 서툰 발음 때문인지. 소리가 자꾸만 뭉개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보름 정도만 지나면 크리스마스입니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때 이른 캐롤이 귓바퀴를 춤추고 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일 년간 겪은 것들이 필름 모양으로 주욱 늘어집니다. 음, 그러니까 나는 오늘 당신을 소리 내어 읽었고, 저녁 대신 먹었습니다.
*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 박준 시집
**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Blessed Christmas) - 캐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