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루유떼베.* 여자가 말했다. 남자는 모르는 이국의 언어였다. 구태여 그것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 사랑에 가장 가까웠고 가장 먼 관계였으니까. 무언갈 묻고 무언갈 답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 그 의미에는 비중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순간은 그저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지나가도 무방했다.
느닷없지만 이기심이란 단어를 곱씹는다. 며칠간 벌어졌던 이별을 관통하면서 타인이 나를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누가 됐든 그에겐 그가 내겐 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도 네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책도 있지 않은가. 이 중요한 사실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가 적어준 글귀를 벽에 붙일 때도, 그가 선물한 엽서에 편지를 적을 때도. 마음의 여백을 채워주는 존재감 덕분에 머릿속에서 좌절이나 후회, 이별 같은 단어들을 폐기해버려도 될 거라고 여겼었다. 함부로 낙관의 미래를 점친 거였다고 생각한다.
감정은 신체 그 자체에서 수반되든, 어떤 관계로부터 파생되든 불가항력을 지닌 탓에 한번 발생한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어떻게든 떨쳐내면 또다시 어떻게든 몸 구석구석에 들러붙어 기어코 자신의 무게감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얼마간 주저앉거나 드러누운 채로 눈을 끔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흘러나오는 액체를 담아낼 수도 없었다. 이렇게라도 배설하지 않으면 마침내 터져버릴 거란 짐작이 뇌리를 스쳤으므로. 한 번 터져버리면 나로서도 통제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저 흘러가도록 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와 나는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액체는 평소보다 밀도가 짙었다. 일련의 기억과 대화가 녹아 스며든 걸지도 몰랐다. 볼을 타고 그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순간과 저녁을 먹으며 나눴던 이야기, 당신의 뜻을 존중해요 하고 섣부르게 약속했던 장면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그러다 분자와 분자 사이의 결합이 끊겨 기화되고 결국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는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관통하는 것은 가슴이고, 찔리고 파이고 닳을 뿐이다. 내일이 되면 그런 가슴을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
살기 위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어쩌면 나는 사람보다 문장을 더 사랑한 게 아닐까. 그랬다면 좀 살만해질까. 그래, 그런 것이다. 밀루유떼베. 나는 너를 사랑해. 이젠 입 밖에 꺼낼 일이 전무해진 그 말을 나는 사랑했었다.
* <원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