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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Mar 28. 2022

단상 1

3월 28일

1.

요즈음의 나는 무엇이 되고 있나, 하는 물음을 자주 곱씹는다. 보거나 들은 것들이 쓰기로 이어지는 일은 좀처럼 없다. 무언가 떠오르려는 징조가 보이면 그 물음이 치고 들어와 전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책상을 만드는 사람은 다리와 몸통, 연결부의 재료와 공구를 정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조립이 완료되면 사방으로 튄 자투리를 쓸어내고, 천연원료를 붓질하여 마감까지 해야만 비로소 하나의 가구가 완성된다. 그러나 원하는 사람이 없다면 의문만 남기 마련이다. 손길과 정성이 들어갔더라도 아무도 찾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쓸 것인지,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줄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2. 

20대 대선을 겪으면서 유난히 정치와 사회, 연예와 스포츠 등 곳곳에서 이슈가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정보의 노출 장벽이 낮아진 환경 때문인지 덮고 덮이는 일들은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고, 왜곡되는 것들도 잊혀지는 것들도 덩달아 늘었다. 그리고 그들은 관심을 주지 않으면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3.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걱정하지 않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일련의 상황과 사건을 관통하면서 누군가는 걱정해야만 한다는 말을 믿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4.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은 안정감이나 편안함, 위로 또는 살아갈 여력을 나눠주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위로도 특정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손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특정 상황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짚어보게 되었다. 언어는 의도 없이도 가시를 품을 수 있다. 나는 그 말의 무게감을 체감한다.      


5. 

내가 누군가에게는 가시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럴 때마다 다이어리를 열어 그들의 이름을 적고, 어떤 장면들을 떠올렸다. 누구나 마음속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할 수는 없다.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지, 인정할 수 있는지, 노력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여긴다. 나는 무슨 노력을 할 수 있나를 생각했을 때, 지난 것은 돌이킬 수 없다는 흔해 빠진 사실과 그것을 수없이 되뇌고도 이제야 실감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스스로를 혐오했다. 
 

6.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에서 배우고, 현재에서 노력하는 것, 미래에는 반복하지 않는 것, 한편으로는 반성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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