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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Jun 13. 2022

적산

노지를 기준으로 파종 시기는 작물마다 다르다. 온도, 일장, 광도 등 생장하기에 적절한 환경 요건이 각색이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거, 벼는 초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일평균기온 합이 적산온도*에 부합한 작물이다. 재배 가능할 정도로 생장하는 데 필요한 온도가 그 시기에 자연히 맞춰진다는 얘기다. 그래서 초여름에 파종한다. 가을에 파종하면 성숙기에 이르는 동안 기온이 불충분하게 낮으므로 정상적으로 생장하지 못한다. 


좀 더 들여다보면 파종 시기에 우리의 생활상이 녹아있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배추나 갓 그리고 쪽파처럼 김장에 필요한 작물들은 여름에 파종하여 늦가을에 수확한다. 그즈음 절여놓으면 겨울에 김장하기 적당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상추나 쑥갓처럼 쌈으로 즐기는 잎채소는 파종하고 두세 달 뒤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생장하므로 심고 뜯고를 반복한다. 보통 봄과 여름에 파종하여 초여름과 늦가을에 수시로 뜯어먹는다. 옥수수, 방울토마토 같은 열매채소는 또 다르다. 늦봄에 파종하여 여름 내내 먹는다. 여름이 제철인 것들.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묵은 강원도의 향토 음식으로 유명하고, 방울토마토는 백 그램에 십육 칼로리를 지닌 건강식으로 널리 알려졌다.     


초여름을 맞아 집 앞 텃밭에는 네댓 번 뜯어먹은 상추가 자라고 있다. 옥수수는 허리 높이만치 자랐고, 방울토마토는 열매의 모양을 갖춰간다. 비료를 뿌리고, 땅을 엎고, 주기적으로 물을 준 것들. 내가 손수 자라게 만든 것들. 바라보고 있으면 돌연 내가 시들게 만든 것들을 운 띄우는 것들. 나는 잎을 틔우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몇 포기의 상추와 몇 뿌리의 감자를 생각했다. 이어서 몸져누운 고추를 보았고, 그 뒤에 무너져있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나 때문에 시들어버린 사람. 우리한테도 적산온도 비슷한 게 있는 거였나, 나는 곱씹었다. 우리 관계를 구성하는 것 중 하나라면 말이 가장 유력할 텐데. 일상 나누던 거. 돌이켜보면 헤어질 무렵 전후로 나는 듣는 날이 말하는 날보다 많았던 것 같다. 네 말에 집중하는 날도 몇 없었고. 뭘 뿌려도 잘못 뿌린 거지 내가. 


이런 식으로 말꼬리를 잡는 후회가 우리를 이어주지 못한다는 현실을 이젠 직시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럴 적마다 마주하게 되는 괴로움만큼은 성실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고. 그래서였나. 나는 저녁 늦도록 텃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적산온도 :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열량을 나타내기 위한 지표로써 생육 일수의 일평균기온을 적산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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