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고독에 빠져보기

인간관계가 너무 어려워서 외로워져 봤습니다.

by 금교준
"용기는 공포에 대한 저항, 공포의 지배이지 공포의 부재가 아니다." - 마크 트웨인


자발적 고독의 정의


자발적 고독에 빠진 지 거의 9개월이 지났다. 내가 말하는 '자발적 고독'이란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친구나 가족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가능한 한 내 의지로 이겨내야 하는 환경을 뜻한다. 예를 들자면, 직장에서 정말 힘든 일을 겪었을 때에도 회복을 위해 시간을 내서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지 않는다. 오히려 힘들수록 글을 쓰거나 홀로 생각에 빠져야 한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극도로 힘들 때는 부모님과 5분, 10분 통화 정도는 한다. 대신 정말 죽도록 힘들 때만!) 그러다 보니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이를 이겨내는 게 정말 쉽지 않다.


스스로 자처한 자발적 고독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이렇다. 평일에는 [집 → 직장 → 집(글쓰기, 책 읽기)]의 패턴을 가진다. 그리고 주말에는 [집 → 카페(홀로 글쓰기, 책 읽기) → 강의(글쓰기, 디자인의 배움) → 모임(새로운 사람들 만나보기) → 집]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질 수 있는 게 바로 '모임'이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과연 '자발적 고독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모임은 친구나 가족과의 만남과는 사뭇 다르다. 왜? '친밀감'이 목적인 만남과는 달리 '시야를 넓히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 친한 친구들과의 만남과 비교해보면 목적의 성격부터가 다르다. 어떻게 보면 새로운 배움의 장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으로 인한 평안이나 안정감을 얻기가 힘든 환경이다. 더군다나 모임의 진행자 역할도 도맡았는데, 이게 참..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적지 않다.

정리해보면, 자발적 고독의 환경은 혼자만의 시간과 온갖 배움의 시간들의 혼합체라고 볼 수 있다.

자발적 고독의 시간 = 혼자만의 시간 + 배움의 시간


자발적 고독은 배움의 희열과 외로움의 고통을 함께 준다.


때문에 자발적 고독이라는 환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홀로 생각하고,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시간을 선물해준다. 거기서 오는 배움의 희열은 지금까지의 학창 시절에서 결코 느끼기 힘든 행복감을 준다. (이게 또 신기하다.)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배움을 갈구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시야도 많이 넓어지고, 생각의 방식도 좀 더 따뜻하게 변한다. 가장 좋은 점은 인생의 방향이 조금 어긋나도 괜찮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결국 그로 인한 모든 것은 경험이 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배움 책 사진.jpg

반면, 이 자발적 고독이라는 환경은 정말 지독한 단점도 갖고 있다. 바로 외로움의 고통을 느끼게 해 준다는 거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이라서, 친한 친구나 가족처럼 친밀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회적 만족감을 충족시킨다. 그래서 그러한 만남의 고리를 묶어두는 자발적 고독은 극심한 외로움으로 고통을 줄 수밖에 없다.

자발적 고독이 주는 것 = 배움의 희열 + 외로움의 고통

한편으론, 친구들을 만나는 걸 자제하다 보니까 이를 '배신'이라고 생각하고 관계를 끊어버리는 친구들도 생긴다. 예를 들면, 한 친구는 힘든 시기에 자기를 위로해주는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는 배신감에 관계를 아예 끊어버린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당시 2~3개월 전에 그 친구가 사는 동네에서 만났던 친구였다.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당시 직장생활이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인간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시기를 가졌었다.

* 잠깐 변명해보자면, 그 시기에 그 친구가 정말 힘들었다는 걸 알았다면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례로 주변에 힘듦을 호소했던 친구에게는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줬기 때문이다. 그때는 나도 업무 부담감에 젖어 우울하고 삶이 힘들었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었다고 말해본다. 그리고 나는 명절 때마다 친한 선배, 동기, 후배들에게 안부인사를 전한다. 그만큼 인간관계를 중요시한다는 말이다. 어찌 됐건, 결국 소중했던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건 사실이고, 내겐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심지어 몸도 마음도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이러저러한 변명으로 해명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생각해보면 도약의 시기마다 자발적 고독에 빠졌다.


이와 같은 자발적 고독의 상태에 빠졌었던 시기가 전에도 있었다. 바로 고등학교 3학년 때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지금을 포함한 세 시기의 공통점을 살펴보자면, 새로운 시작을 위해 도약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고3 때는 대입을 위해서, 대학교 4학년 때는 취업을 위해서 '자발적 고독'의 시기에 빠졌었다. 둘 다 공통적인 부분이, 만남보다는 개인적으로 숙성되는 시기였다는 거다. 하루 3시간 자는 시간 빼고는 죄다 공부를 했다던지, 취업프로그램과 멘토링, 알바 등으로 시간을 꽉꽉 채우든지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행동양식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전역 직전의 시기로, 새로운 삶을 향한 도약의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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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비슷하다. 친구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혼자 뭔가를 배우거나, 생각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 수단들만 조금씩 바뀐 것뿐이다. 여기서 문득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럴까? 동일한 행동양식을 반복해서 보일까?'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이는 나만의 본성인 것 같다. 도약하는 시기가 되면 어느 한 수단에 집중적으로 몰입하는 경주마가 되는 사람. 그 결과는 달콤하지만 과정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행동양식. 다행인 점은 결과가 달콤할 것이란 걸 알기에,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시기였던지 간에, 달콤함의 크기는 고통의 그것보다 컸기 때문에.

자발적 고독의 결과 : 성취의 달콤함 > 외로움의 고통

이를 깨달은 덕분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갈 때도 심각하게 슬프지는 않다. (그렇다고 무뎌진 건 아니다.) 그건 그 사람과 나의 운명인 거니까. 어차피 결국 돌아올 사람은 돌아와 준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해줬다. "너는 될 줄 알았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 그렇게 나도 악의가 없었다는 걸 표현하고, 이를 아는 사람들은 더 견고하게 내 사람이 된다.(내 사람이라는 표현은 그들이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곁에 남아준 사람들과 나는 서로 간의 신뢰 벽이 매우 두텁고 단단하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또 다른 도약의 시기에 자발적 고독의 상태에 들어가더라도 묵묵히 바라봐준다. 그렇게 나의 성장을 보며 응원해주고, 그 누구보다 좋은 조언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때문에, 나는 외로움에 대한 공포를 지배할 수 있다.(아직은 조금 미숙하지만..!)


따라서 나는 오늘도 도약을 위한 '자발적 고독'을 즐긴다.

더 달콤한 성취를 위해! 믿어주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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