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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Sep 13. 2020

코로나 우울증이 뭐예요?

코로나 한 움큼과 피자 한 조각의 관계

국내 코로나 첫 확진자는 2월 20일에 발생했다. 오늘은 9월 13일이다. 코로나가 발생한 지 겨우 7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일상생활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됐다. 단체로 모여 직접 질문하고 답을 얻던 ‘교실’은 작은 모니터 속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대학교 강의실마저. 무슨 일만 있다 하면 ‘회의’다 뭐다 하고 모였던 업무 형태는 재택근무로 변했다. 주말마다 힐링의 목적으로 이뤄졌던 다양한 ‘모임’들은 어느새 ZOOM 등과 같이 화상 통화로 대체되고 있다. 한 마디로 실질적으로 부대끼던 ‘직접’ 만남 형식은 ‘간접’ 만남으로 변했다.


이 상황을 보고 느끼는 현 소감은 ‘썩 좋지 않다..’라는 말. 기본적으로 우리는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웃으며 관계를 맺어야 활기를 띤다. 관계라는 녀석이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일정 부분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반대로, 이게 사회적 교류가 안되면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는 데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심리적’인 부분과 관련된다.


대표적으로 ‘우울증’. 마음의 감기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학생에게는 ‘성적 저하’를, 직장인에게는 ‘생산성 저하’를, 일상생활 중에는 ‘삶의 의욕 저하’를 가져다준다. 심각하게는 ‘자살’로 이어지는 게 바로 이 질병이다.(다들 잘 알고 있듯이!)


코로나 우울증으로 향하는 급행열차 안의 풍경


우울증의 원인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바로 ‘인간관계’다. 인간관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은 상처 받는다. 잘 생각해보면,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상황은 보통 ‘따돌림’, ‘직장 내 왕따’등으로 인한 ‘소외감’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코로나라는 국가적 재난 사태 때문에 ‘자발적 격리’를 하고 있다. 격리를 한다는 건? 사람들로부터 나를 의도적으로 ‘소외’시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울증’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단체로 타는 것이다.


일례로, 나와 룸메이트의 상황을 소개할 수 있겠다. ‘국가’ 차원에서 격리를 권장하고 있는 지금, 룸메와 나는 숙소에 ‘갇혔’다. 물론 부대 앞 정도는 외출증을 내고 갈 수 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실질적으로는 꼼짝없이 갇힌 셈이다. (나는 현재 부대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상황이 반복되니까 점점 마음의 병이 쌓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금요일이 돼도 삶의 기대를 안 하게 되고, 주말이라는 설렘이 사라졌다. 주말마다 스트레스를 풀던 친구들과의 연락도 자연스레 끊겼다.(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던가? 그게 친구 간에도 이뤄진다는 걸 이번에 확신했다.) 심지어 가족들과 얼굴 보며 대화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사회적 교류가 거의 끊기고 있는 것이다. 자연스레 쌓여가는 스트레스를 차곡차곡 쌓아두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나름 돌파구로 읽을 책을 수십 만 원어치 사서 주말마다 독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지식을 쌓는 시간이 생겼다는 마음에 마구 설레긴 했는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친구들과 하던 대화가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그 덕분인지 혼잣말이 유독 늘었다. 심지어 사이버 대학교를 통해 대학 강의까지 듣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는 생각은 하나다.


‘역시 주말은 가족/친구들이랑 수다 떨어야지!’


얼마 전부터는 룸메이트마저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 같다. 공부하다가 혼자 노래를 부르고, 혼잣말을 난무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기적으로 쉬어주는 한숨은 멘틀을 뚫고 외핵한테 인사하는 수준이다. 어느 날은 내 방에 찾아와 도저히 못 버티겠다며 침대에 드러누운 적도 있다. 원체 강한 친구였는데 그런 모습을 보는 심정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여자 친구가 있는 데도 못 보고 있는 게 더 안쓰럽기도 하다..)


우리 피자 먹을까..?


오후 2시. 문득 창밖을 응시했는데 하늘이 그림 같았다. 이런 날은 역시 한강에 돗자리 깔고 피맥이나 치맥인데.. 아쉬운 대로 룸메에게 한 마디 건넨다.


“저녁에 피자나 시켜먹을까? 가는 길에 산책도 좀 하고”


어찌나 지쳤던지 룸메도 흔쾌히 수락하고, 숙소를 나섰다. 오랜만에 파란 하늘을 보며 걸으니까 마음속이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더 기분 좋은 사실은 3시간 전에 주문해야 먹을 수 있는 피자를 한 시간 전에 전화했는데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부대 안에는 나름 브랜드 피자집이 한 곳 있어, 썩 괜찮은 피자를 맛볼 수 있다.) ‘닭발’, ‘연탄불고기’, ‘초밥’ 등등 온갖 맛있는 걸 못 먹는 입장에서는 빛과 소금인 셈이다.


룸메랑 길을 걸으면서 미래 얘기를 시작한다. 물론 ‘이름난 작가가 되겠다’라던가, ‘에너지 사업부를 이끌겠다’ 등의 말은 이제 시시하다. 단지 원초적인 미래를 바라볼 뿐. 가령, ‘이 상황이 언제 끝날까?’ ‘우리 다시 나갈 순 있을까?’ ‘내년까지도 계속 이러면 어떡해야 할까?’ 등등.. 사회, 문화적 교류가 통제된 우리에겐 이 상황이 언제 해결될까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속속들이 들리는 바깥사람들의 소식도 조금씩 곁들이면서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적 의무감’ 사이를 갈팡질팡 해보기도 한다.(객관적으로 바라보면, 꽤 재밌다.)


피자 한 조각으로부터 나름의 위로를 얻는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박탈감’과 방어기제인 양 떠오르는 ‘의무감’을 경험하다 보면, 사람마다 상황을 인식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A는 심각성을 중대하게 느껴서 자발적으로 자유를 참는다. 거기서부터 사회적 교류가 끊기고, 우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B는 ‘마스크’의 힘을 빌려 이곳저곳을 놀러 다니며 자유를 누린다. 사회적 교류는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어서 마음은 비교적 괜찮다. 그러나 상황의 불편함은 느낀다. C는 사회적 의무감을 지키기 위해 강제적으로 ‘자유’를 박탈당한다. 강제로 하면 더 힘들다던가? 답답함과 그리움에 몸서리치며 마음에 병이 쌓인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피자가 나오고, 한 조각 집어 드는 상황에 도달한다.(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참 단순한 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부터 뇌가 온갖 행복 호르몬을 분비하는 듯 기분이 좋아진다. 핫 소스를 슥-슥 뿌려다가 갈릭 디핑소스까지 담뿍 찍어 바르면 ‘말해 뭐해’다. 게 눈 감추듯 피자를 먹고 나서, 룸메랑 나는 ‘조금만 쉬다가 공부하자!’라며 각자 방에 들어왔다. 이쯤 되면 그래도 이렇게 맛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게 어디냐며 마음속 위로를 거듭한다. 새삼 소박한 소망을 하나 외우며 코로나의 주말을 이대로 마무리한다.


"다음 주에는 가족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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