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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교준 Sep 11. 2020

타인의 관심에 울고 웃는 사람들

“인간 본성에서 가장 뿌리 깊은 법칙은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 윌리엄 제임스(19세기 미국 심리학자)


“와~ 너 이거 어디서 샀어? 잘 어울린다~”

“이번 프로젝트는 OOO 대리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어. 고마워.”


위의 말을 듣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어떤가?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가? 이처럼 우리는 타인이 해주는 말들에 쉽게 웃는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런 순간은 순식간이라는 거다. 사람들은 본인 삶을 사느라 바쁘기 때문에 계속해서 칭찬해줄 만한 여유가 없다. 대신에 조금이라도 수틀리는 상황이 생기면 우리를 내리 깎는 말들을 던진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기분은 사정없이 추락하고 온갖 우울감에 휩싸이는 건 우리 몫이다. 


“오늘 옷이 조금 난해한데..? 대체 어디서 산 거야?”

“이 보고서 누가 이렇게 쓰라고 했어? 멍청한 놈!” 

 

한 시름 놓아도 좋다. 다행스럽게도 한없이 추락한 우리 마음은 간단한 방법으로 회복된다. 친한 친구, 사랑하는 가족, 연인 등등 주변 사람들과 대화함으로써 우울감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퇴근한 뒤에 친구와 마시는 맥주 한 잔과 곁들여지는 상사의 뒷담 등등 상상만 해도 속이 후련하다~ 


문제는 타인의 관심에 유달리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라면, 간단한 전화통화만으로도 충분히 감정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직접적으로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속적인 위로를 받기 위해 타인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상대로 하여금 일상생활을 못하게 만들 정도로 심각해지는 경우도 있다. ‘집착’이나 ‘구속’의 행위로 변질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젯밤에 한 친구가 고민 상담을 요청해서 밤새 이야기를 들어줬다. 친구의 말을 들어봤을 때, 상사가 정말 못살게 구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틀, 일주일, 한 달이 넘도록 매일 밤 전화해서 위로를 구한다고 해보자. 심지어 중요한 회의 시간에도 계속 전화하더니, 급기야 왜 전화를 안 받냐며 화를 낸다면?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니, 건강하게 견뎌낼 수 있겠는가?


상대방은 지금 무척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 때문에 친구에게 의지하여 감정을 해소하게 된다. 친구는 상대의 감정을 받아내면서 깊이 공감해주고 위로를 더해준다. 상대방은 이런 위로를 받다 보니까 안정감을 느끼고, 위로를 전해주는 친구에게서 더 안정감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다 힘든 일이 없더라도 마치 의무처럼 친구에게 고통을 호소한다. 정말 사소한 일에도 말이다. 그러다 보면 안정감을 갈구하는 행동은 ‘집착’이나 ‘구속’이 된다. 이를 받아주고 있는 친구는? 부정적인 말들을 들어주다 보니 되려 우울해지고, 집착받다 보니까 일상생활에 지장이 가기 시작한다. 


그들은 걸음마를 시작할 때 부모로부터 통제받거나 방치된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다. 발달 정신병리학적으로 봤을 때,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타인의 관심을 받지 않고도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는 ‘자아상’이 부족하다. 보통 고통을 해소하고 나면 그 안정감을 ‘자아’가 유지해주는 데, 이 부분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거다. 


12-24개월의 아이들은 양육자의 생각과 맞지 않는 때조차도 자신의 목적과 목표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양육자를 “안전 기지”로 삼고 주변에 있으면서 신체적, 심리적으로 분리를 시도하며 독립의 기술을 연습한다. 이 단계는 자기 인식과 자기 행위성, 행동의 주인으로서의 자기의 출현을 향하여 발달적 변화가 일어나는 특징을 가진다. - <발달 정신병리학>, Charles Wenar-Patricia Kerig 공저


사람이 태어난 후 ‘자아상’을 형성하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발달 정신병리학에서는 그 시기를 12~24개월 사이로 본다. 이 시기를 [인식적 자기] 단계라고 하는 데, 부모와 반대될 지라도 자신의 목적과 주장을 내세우는 시기라고 보면 된다. 예를 들면, “나는 이거 하고 싶어!”라던지, “이거 먹을래!”와 같은 행동이다. 아이는 이런 말을 하면서, 부모의 반응을 살피고 자신의 독립성을 키우게 된다. 


이때, 부모가 아이의 주장을 가차 없이 무시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결정이 철저히 무시되는 걸 보며 ‘나는 옳은 판단을 못하는구나’란 생각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아이를 지나치게 내성적이면서도 타인의 관심을 속으로 갈구하도록 만든다. 대개 이러한 아이들이 한 번 관심을 받으면, 관심을 준 이에게 집착하는 성향을 보인다. 


반대로 무조건적으로 수용된다면? ‘나는 모든 게 옳구나!’하며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될 수 있다. 시간이 지나 아이는 다해주는 부모에게 계속적으로 관심을 어필한다. 이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가고, 겉으로 보기에는 외향적이면서도 밝은 아이로 보이게 해 준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자만심으로 똘똘 뭉친 상태다. 이런 사람에게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게 되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 재해’를 겪게 된다. 난무하는 욕설과 호통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12개월~24개월의 아이가 있는 경우, 아이의 주장을 들어주고 이유까지 물어보는 게 좋다. 그럼 아이는 자신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주장을 누그러뜨리거나 나름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를 말해줄 것이다. 그 이후에 적당히 주장을 들어준다면 아이는 자신의 의견이 ‘존중’ 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건강한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미 다 성장한 친구가, 동료가 관심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는 ‘적당한 공감’을 보여줄 때다. 상대방이 힘든 상황이므로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는 건 좋다. 그러나 자신의 일상 시간이나 수면 시간을 모두 소모해가면서까지 들어줄 필요는 없다. 만약 너무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싶으면,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적당히 끊어내면 된다. (다분히 계산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도/상대에게도 좋은 길이 ‘적당함’의 길이다.) 상대에게 공감해주는 것도 좋지만, 그로 인해 내 생활을 못하는 건 또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 삶은 내가 산다!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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