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윤영 시집 <어떤 입술 >

출판사 보도자료

by 라윤영

2014년 시선 신인발굴로 등단한 라윤영 시인의 첫시집. 불편한 어제와 오늘을 견디며 끊임없이 불화하며 불화를 밀고나가는 서정이 두드러진다. 라윤영의 시는 쉽게 반성하고 고백하지 않으며 상투적으로 타자와 손잡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기존 가치 체계에 대해 눈길 돌리지 않고 오히려 반항적이며 냉소적이다. 그는 현실을 보이는 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이 시집에 존재하는 수많은 ‘입술’들은 특정할 수 없는 ‘어떤 입술’이다. 시적 화자는 입을 통해 빨고, 먹고, 깨물었던 기억을 소환하여 영혼의 정수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돌격’, ‘가격’, ‘침투’, ‘숙영지’, ‘전투’, ‘매복’ 등 수많은 군대용어들이 시적화자의 삶 속에 파고든 불안과 강박의 기표들로 그려진다.
그리하여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날것 하나 갇혀 있는 여기는 어디일까, 모든 절망이 멈추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서쪽의 열쇠를 되찾을 수 있을까, “하나를 가진 자는/ 행복이라고 쓸 수 있다/ 나는 무엇 하나로/ 이 지친 삶을 위장하고 있을까”(위험한 그림자) 등이 그것이다. 한편 “한 달 내내 번 돈을 도둑맞은 눈빛으로” “여자를 떠나보내는 것과/일평생 번 돈을 첨탑에 빌려주는 일은 동일하다”(분홍 여자) 라든가 “구멍 난 취침등 표면/ 고요히 입주하는 초록/ 푸른 손톱 등에 자라나고/ 차가와지는 당신을 위하여/도둑맞은 나를 찾으러 간다”(「벌거벗은 개」) 토로한다.
해설을 쓴 이민호 평론가는 해체된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 구순적 욕망을 반복해 추구하지만 이 찢긴 세계에서 그를 회복시키는 은유, 그의 시에 나타난 ‘나무’와 ‘바람’의 이미지에 주목한다. “갇힌 자아(그림자)는 나무로 변주되어 우주를 꿈꾸는 상승 욕망을 표출한다. 이 순간 입술 속에 갇혔던 라윤영의 시적 상상력은 우울과 침묵의 기억을 폐기하고 리비도의 출혈을 지혈하며 상처를 아물게 한다. 이 수직의 상상력은 ‘바람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이 경이로운 바람의 동력은 찢긴 세계의 문 앞을 서성이며 손에 쥐고자 했던 자유의 언어다. 바람의 상상력은 ‘거친 땅 뚫고’ 상승하는 씨앗의 축제를 기원한다. ‘나무’와 ‘바람’은 캄캄한 데카당스를 열고 나온 별과 같다.”고 해설하고 있다.
정우영 시인은 “라윤영의 시에 고이는, 불화의 뜨거운 시선이 나는 한없이 반갑다. 살아감의 고투가 안쓰럽게 배인 그의 시들을 보라. 시적 응전이 얼마나 드세게 기록되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 그런지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스스로도 모르게 어떤 에너지가 생성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이것을, 라윤영 시가 가진 불화의 활력이라고 믿는다.” 헌사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더 이상 길이 없어도/ 사랑이 지나가네/ 부서진 얼굴이 웃고 있네” (하얀 웃음)라거나 “이곳은 약간 어두운 곳/ 여전히 기다리는 중” (「풀잎 속 붉은 고백을 듣다」)이라는 고백 곁에 있는 것은 아닌지. 유토피아는 늘 저기에서 웃고 있지만 부활을 꿈꾸는 시인, 라윤영의 시세계는 새로운 곳으로 새롭게 자라고 있다.


■ 추천사

시는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 불화를 딛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불화하는 시인은 고단하다. 순응과 타협의 유혹을 넘어서야 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시에 맺히는 불화가 아무리 힘들고 버거울지라도 허리 곧추세워야 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게 곧 시인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라윤영의 시에 고이는, 불화의 뜨거운 시선이 나는 한없이 반갑다. 살아감의 고투가 안쓰럽게 배인 그의 시들을 보라. 시적 응전이 얼마나 드세게 기록되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래 그런지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스스로도 모르게 어떤 에너지가 생성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이것을, 라윤영 시가 가진 불화의 활력이라고 믿는다. 불화를 통해 불화를 넘어선 삶의 숨결들을, 그의 시는 지금 여기에 불어넣는 것이다. 수많은 곡절과 아픈 수모들을 버텨 이룬 값진 성취에 함께 기뻐한다.
- 정우영(시인)


■ 책속에서

불편한 어제를 지우고 지금 떠나고 있다
불친절한 구름 사라지고
담배연기 바닥을 포격하고 있다
헤어진 신발들 흩어지는 연도를 따라 웃음을 만난다
질척거리는 이 거리는 누가 웃고 갔나
정오와 헤어진 얼굴이
방금 전 웃음으로 지나갔다
하나의 풍경을 위해 새는
햇볕을 조금씩 찢어 먹고 있다
우리 동네는 어디서 살고 있나
겨울 눈사람 건축된 이곳
늦은 봄으로 계절이 사라지고
서쪽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너의 말 안에 잊어버린 얼굴이 살고 있다
들풀 밟히고 가지 끝 춤추는 벌레와
다른 웃음으로 우는 나무들
기억이 살고 있는 그림자 안 깊은 세상
낯선 말이 낯익은 얼굴로
이상한 계절을 따먹고
쓰러져 나간 굳은살들
에덴은 죽은 씨앗 꿈틀거리고 있다
옆구리 속으로 침투하는 칼날 하얀 손
다시 시작해
모든 절망이 멈춘다
- 「서쪽」 전문

해 질 녘
서투른 아이가 불투명한 발음으로
우울을 말하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귀를 가진 풀잎은
얼굴을 숨기고 있다
갈림길에서
모자를 눌러 쓰고
그 여자가 다시 지나갈
확률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를 가진 자는
행복이라고 쓸 수 있다
나는 무엇 하나로
이 지친 삶을 위장하고 있을까
붉은 립스틱으로 읽고 있는 입술이 웃는다
욕망이 사라지고
방문을 잠근
위험한 데카탕스
없는 더 깊은 어둠으로
그림자가 사라진다
- 「위험한 그림자」전문

전봇대 두 팔을 벌린다
화단의 꽃은
벌에게 나비에게
헤픈 몸을 허락한다
몸을 주는 게 아니야
그럼 뭘 주지?
모든 것
모든 것 안에는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보수공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다시 고치며 친절하게 걸어가는
먼지의 발은 가볍다
모든 가벼움은 멀리 있다
애인을 만나 욕을 먹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은
철 없는 계절들은 저기에
늦은 아침을 만나고
역전 의자에 내려앉은 먼지처럼
엉덩이들의 자리는 어디였지?
열차들이 행선지 없는 곳으로 떠나고
잃어버린 자리들은
모두 역전의 엉덩이가 된다
기억이 사라지듯
사람이 사라지고
전봇대의 팔이 움켜쥔 그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잠시 뒤,
엉덩이들이 사라졌다
- 「사라진 엉덩이」 전문

들어갈 수 없는 문이 있었네
골목 지퍼를 잠그고
조용한 밤이 걸어가네
문을 열어줄래?
방 안엔 오래된 그림들이
집을 나간 애인을 기다리듯
벽 속 시간은 고요히
그림자는 모두 지나간 말
벽 속에 문장을 만들고
다시 짓는 빈집
기억이 할퀸 손톱은
풀잎 푸른 입술로
또다시 파르르
발음하는 어떤 입술
비밀의 혀를 숨기고서
- 「어떤 입술」 전문

저기, 별은 누가 던진 돌멩이일까
한 무리의 돌멩이 별무덤 되었다
재개발지구 회화나무들
자라지 못한 잎들 지상으로 입관하였다
입을 함구한 나무들의 항거
바람에 꽃이 지고 풀잎들 한쪽으로 기울었다
발부리에 채인 돌멩이를 정원에 심는다
입을 다문 정원의 꽃들
이별의 블루스 들리지 않는
담벼락 넝쿨들 푸른 멍 들었다
씨앗들 거친 땅 뚫고 돌 틈 사이 돋아주기를
세상의 나무들처럼 하늘로 올라서기를
누군가의 손에 닿으면 돌멩이는 별이 되기도 하였다
돌멩이 하고 부르면 바람의 손에서 날아가
오늘, 시가 되기도 하였다
여기 돌멩이 하나 있다
- 「돌멩이」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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