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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대유감 Jul 07. 2020

사라진 시간 : close to you

맨 얼굴의 나를 만났을 때

출처 : 카카오페이지 <사라진 시간>


영화의 시작과 끝은 같은 화면이다. 달라진 것은 흑백이냐, 컬러냐 뿐이다. 즉 나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배경뿐이다. 박형구(조진웅 역)는 영화에서 두 가지 삶을 산다. 하나는 형사로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삶, 다른 하나는 선생님으로서 가족 없이 혼자 살아가는 삶이다. 


두 가지 삶의 다른 점은 형사의 삶은 고단하지만 그가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점이고, 선생님의 삶은 외롭고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점은 모두 '박형구'라는 인물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박형구는 누구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박형구'이다. 


persona, 가면은 흔히 배우에게 사용하는 단어이다. 배우는 자신의 삶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극 중의 역할을 연기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그 역할의 감정과 생각, 고뇌를 전달한다. 우리는 배우의 진정한 모습을 가면이 아닌 가면을 벗음으로써 알 수 있다. 


출처 : 카카오페이지 <사라진 시간>

하지만 보통 사람들 또한 가면을 쓰고 산다. 직장에서의 나,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 친척들 사이에서의 나, 가족들 사이에서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는 같은가? 영화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감독은 이를 "내가 생각한 나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와의 갈등"이라고 말했다. 즉 사회적인 나 vs 맨 얼굴의 나와의 갈등이 영화를 관통한다. 


사회적인 나와 맨 얼굴의 나는 끊임없이 철창(경계)을 사이에 두고 손을 맞잡고자 애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타인에게 맨 얼굴을 보여주는 순간 "미친놈"이라는 소리만 듣게 된다. 선생님으로서의 삶은 박형구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사실 "경찰"이 되고 싶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경찰이 되지 못했다)그리고 "안락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싶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있음에도 그는 혼자 살고 있다) 그러나 형사였던 박형구는 술에서 깬 후 자신이 수사 중이던 사건의 인물 즉, 선생님이 되었다는 사실에 "갈등"한다. 


그래서 그는 학교에 출근하지 않고, 교장 선생님한테 대들며,  (맨날 수학만 하냐며) 수학 시간에 학생들에게 체육을 하라고 말하고, 학생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자신이 평소에 부도덕하게 생각하는(불륜) 학생의 부모님을 칼로 찌르고(실제로는 고라니를 찔렀다), 학생에게 학생의 아버지가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즉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 "맨 얼굴의 나"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출처 : 다음 영화


선생님으로서는(사회적인 나) 해서는 안 될 것들을 하면서, 박형구의 갈등은 서서히 봉합되어 가며 안정을 찾는다. 다시 말해 박형구는 맨 얼굴의 나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한 것이 바로 집 안에 있던 철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철장을 제거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내면의 나를 억제하고 가두기 위해 만들었던 벽을 허무는 것이다. 


나를 가두던 벽, 결국 철장 사이에서만 마주 잡던 손을 이젠 (경계 없이) 당당하게 잡는다. 폭력적이고, 게으르고, 무책임한 나의 내면적 모습의 나와. 사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맨 얼굴의 나가 진짜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진짜란 말인가?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이를 억제하는 것은 사회이지, 내가 아니다.)


하지만 아직도 모자란 부분이 있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의 원제가 <close to you>라고 밝히면서, 시나리오 쓰는 내내 carpenters의 close to you를 들었다고 말했다. 박형구에게 부족한 부분이 무엇일까? 바로 "너 you"이다. 


맨 얼굴의 나에 직면한 그는 이제 나의 맨 얼굴을 그대로 봐줄 타인이 필요해진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는 사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타인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영화 말미 초희와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close to you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초희가 말한다. 

"밤이 깊어지면 전 다른 사람이 돼요. 아침이 오면 내가 어젯밤에 뭐였을까 궁금해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요.... 이해 안 되시죠?" 


형구가 대답한다.

 "나, 그거 알아요. 그거 아프죠. 그게 많이 아파요...... 울지 마요.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니까."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가면을 벗고 맨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왜 가면을 벗어야 할까? 어쩌면 가면을 벗고 맨 얼굴로 타인과 만날 때에만 진정한 만남을, 진정한 교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가면의 시간은 한 인간에게는 사라진 시간이나 마찬가지이다. 가면의 시간은 누군가를 오롯이 만날 수 없는 시간이다. close to you 가 불가능한 시간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나는 그대로이고 세계가 변했다(배경이 변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만 변한 것이 아니다. 내가 변했고, 그래서 세계도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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