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해도 죽지 않을 이유를 찾아서
철학에는 항상 흥미가 있었다. 평소 사고의 관심사가 행복, 삶의 이유, 그리고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들의 원인은 아무래도 그것들이 내게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삶의 이유는 행복밖에는 찾을 수 없었으면서도 행복은 내게 너무나 잠깐만 왔다 가는 감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은 꽤 안락해 보이는, 행복을 좇는 달리기로부터 지치지 않고 해방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어찌 보면 사회적으로는 부적절해 보이는, 생각을 나는 부정하려 했다. 끊임없이 삶이 죽음보다 가치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사고해 왔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요약되는 논리를 갖게 되었다.
나는 고통보다 행복이 훨씬 가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행복은 삶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무리 고통을 겪더라도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25년도 1학기, 철학수업을 들으며 이것에 대해 더 심도 깊은 생각의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내가 선택한 철학개론 수업은 서양철학사를 시간순으로 개괄하는 방식이었다. 매주 하나의 철학자를 다루며, 조별로 한 철학자를 맡아 공부한 내용을 발표하고 교수님의 추가설명이 이어지는 식이었다. 내가 속한 조가 선택한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 삶은 고통이라고 단언한 그 철학자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을 욕구를 충족하려는 과정과 충족된 상태의 무료함을 진자처럼 반복하는 고통이라고 보았다. 쉽게 말하자면,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은 잠시이며, 곧 무료함이 찾아와 또 다른 욕망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한 그에게 있어 자살하지 않을 이유는 그것이 '최고의 도덕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위배되는 "엉터리 구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는 삶이라는 고통에 자살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삶을 추구하는 맹목적 충동을 거부'하며 사는 것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진자처럼 반복되는 고통의 굴레에서 비켜서 욕망을 충족하려는 충동을 거부하고 삶에의 의지를 인지하여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쇼펜하우어에 대한 공부는 거부감과 함께 날 위로해주기도 하였다. 곱씹을수록 그의 생각 중 일부에 동화되었고, 내 생각을 어느 정도 바꾸게 되는 계기였다. 스스로의 삶의 근거를 부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어쩌면 위에 적은 내 논리는 부정당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말 고통보다 행복이 더 가치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행복이 삶의 의미라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의 삶은 죽어도 되는 걸까.
그럼 나는 어디에 놓이는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삶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결론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던 위태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쇼펜하우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살에 대한 생각은 나와 다르다 느꼈기에 다른 철학자를 찾게 되었다. '니체'가 다음 수업에서 진행되면서 내 흥미를 끌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로 유명한 철학자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신이 보장해 주던 진리, 도덕, 그리고 삶의 근거가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종교적 가치로 보증되던 삶을 살아야 할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이 순간, 내가 이미 허무주의자였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은 자연히 따라오는데, 니체는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낸다. 후대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생각이 바로 그것으로, 절대적 가치는 없으니 당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삶을 정면으로 긍정하는 힘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누군가는 젓가락을 만드는 것이 삶의 가치일 수 있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일 수도,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결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가치 창조는 또 다른 자기기만처럼 느껴졌다. 또한 너무 강한 인간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니체는 내 질문을 더 날카롭게 벼렸다. 이때,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실존주의의 핵심 책들 중 하나로 꼽는 글을 보게 되었다. 나는 니체를 덮고, 카뮈를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