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린 모두 남일까..?
20대 후반에, 조병화 시인의 '남남'이라는 시를 처음 접한 뒤로부터, 내 마음과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주제, 바로 '남남'.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던 때,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그간 그저 아빠-아버지로만 알고 있던 그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는 사실,
그 또한 어떠한 사생활이 있었다는 사실,
항시 밤이면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웠던 그에게도 말 못할 아픔과 슬픔이 있었다는 사실,
그의 그림자 너머에 있던 이 무거운 사실들을 접한 뒤,
나는 처음 낯설게 아빠와 난 어쩌면 남이었는지도 모른다는 가슴아픈 결론을 내렸던 기억.
엄마의 말기암 선고 이후,
말 못 할 고통 속에서 외롭게 투병생활 했을 엄마,
내 생활이 바쁘다며 그저 형식적으로 전화했을 때의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자고 찾아온 아들이 그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자식들에게 폐끼치지 않으려 내색하지 않은 자신의 그 아픈 속내를 들어주기보단, 눈도 잘 안 마주치고 오직 자기 힘든 것만 연신 토해내는 아들을 바라봤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끼리도,
결국 남이라는 낯뜨거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그 관계는 이미 지상에서 지속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가족은 그나마 가까운 남.
이제
그나마 가까운 남이었던 가족마저 다 떠났다.
이제 난 진정 남인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 던져져,
나를 남처럼, 너를 남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 그리고 살게 될 것이다.
'남'이라는 단어를 입에 붙일 때, 가슴이 메어진다.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에도, 누군가의 자식이었음에도, 나는 '남'이었다는 사실.
너와 나 사이의 메울 수 없는 큰 여백은 빈 황무지가 아니었으면 한다.
초록빛깔 가득 녹음이 푸르른 절경으로 메인 그 여백이었으면 한다.
나는 그의 슬픔에 도달할 수 없었지만, 그 여백에 새들이 놀러와 아름답게 노래하며, 그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했기를.
나는 그녀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위로할 수 없었지만, 그 여백엔 초여름 시원한 바람과 기분 좋은 햇살이 가득했기를.
남남은 내가 넘어설 수 없는 벽.
우린 각자의 벽 속에서 아둥 바둥 사는지도 모른다.
그 벽 틈에도 한 송이 꽃은 핀다.
영영 닿을 수 없지만, 나도 모르는 순간, 무엇인가 나와 너 사이에, 우리 사이에, 어떤 '꽃'이 폈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