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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의 고고학 Nov 08. 2023

인간은 '합리적'일까? '합리'로 설득 가능할까?

서양철학은 '인간'은 '이성적'이라는 대전제에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 자연철학자들로부터 시작된 인간 '이성'의 역사는,


이성적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하고 - 형이상학 - ,

'인간과 공동체'를 탐구(윤리/정치철학)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데카르트 이후, 주체객체의 이원론적 문제가 제기되며,


'인식론'이라는 문제가 대두되는데,


근대시기부터, '과연 인간은 이성적일까?' 달리 말해, '합리적'일까?라는 문제가 덧붙여 제기된다.


물론 역사 중간 중간 이성을 부정하거나 새로운 시선을 던져주는 학파들, 

이를테면 에피쿠로스, 회의론자들과 중세엔 스코투스로부터 시작된 '주의주의' 흐름, 윌리엄 오캄,

근현대엔 스피노자/쇼펜하우어/니체 등,

'이성'보다는, 우리 안의 욕구나 내면, 바로 동물적인 부분이 더 강하다는 관점이 등장하지만,

결국 이 흐름도, 다시금 '이성' 안에서 인간의 동물적인 부분들을 재조명하는 것이기에

여전히 '이성 중심의 철학' 안에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유럽 대륙철학의 계보에서, 이성과 의지의 다툼이라는 큰 축이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론, '이성'이라는 말이 철학 안에서 쓰이지 않고,

이제 인간을 어떤 개념으로 정의하기보다는, '복잡스러움 그 자체'로 분류한다.


반면, 분석철학 이후 '영미철학'이라고도 불리는(유럽에선, 앵글로색슨 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계보는,

여전히 '이성'이라는 큰 축 안에서, '인간'을 기계론적으로 파헤쳐 들어간다. 


영미철학적 논의를 살펴보면, 수학의 진도가 1차함수에 머물러 있는 듯 하다. 


특별히 인식론의 문제를 살펴보면, 여전히 주체와 객체의 이원론적 도식을 넘어서지 못 한다. 

주체라는 x축과 객체라는 y축에, '환경과 시간과 배경지식과 감정과 장소, 역사'라는 변수가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는다. 


중세에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다면,

근현대에 들어서서는, 영미철학 계보는 이제 '철학은 과학의 시녀'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틀을 깨려는 여러 시도가 엿보이긴 한다. 

그 흐름엔 자연주의 인식론과 비자연주의 인식론 두 흐름이 있는데

비자연주의 인식론이 말하자면, 다른 자연과학적 성과는 배제하고, 오직 철학적 성찰 안에서만 '인식론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자연주의 인식론은, '사회학/심리학 등' 기타 인문과학 내지 자연과학의 학문적 발견을 도입하여 인식론적 외연을 넓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 구분은 말장난일 수도 있다. 

철학이라는 정의의 외연을, 인간과 자연 현상을 인간 이성을 통해 추상화하여, '개념화'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했을 때, 철학 이외의 다른 학문도, '철학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상상력을 통해 가정한 것을, 숫자를 입혀 증명해보니, 자신이 상상한 것이 실제로 자연현상에 부합되는 이론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예가 그렇다. 

물리학이라고는 하지만, 인간 이성의 직관을 통한 자연현상에 대한 성찰에서 이론이 비롯된 것이기에, 하나의 철학적 방법론이라 볼 수 있다. 


근대 시기, 독일 철학자 '볼프' 이례로, 학문이 구분되면서, '철학과 과학'이 구분되었지만,

엄밀히 고대부터 철학이 과학이자 과학이 철학이었다. 

어쨌든 이 관점을 토대로 보자면, 자연주의 인식론과 비자연주의 인식론의 구분은 말장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 속에서,

영미철학에서, 새로운 인식론 모델을 제기한다. 바로 '덕 신빙론' 모델이다. 

기존의 다소 폐쇄적인 차원의 인식론 모델, 무시간적/무공간적? (다소 이상한 표현이지만) 인식론적 모델 안에선, 오직 주체가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 '정당화/믿음/올바름', 이 삼박자가 맞아야, '지식'이라 칭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소 기계론적이고, 삶의 다채로움을 제거한, 인식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소사로부터 시작된 덕 신빙론은 린다 자그제프스키의 덕 책임론으로 발전하여

새로운 인식론 모델을 제기한다. 

바로 '인식의 정당성'은, 주체의 어떤 과정에서 생기기보단, 지성의 덕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모델에 비교하면, '지성의 덕'이라는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개념에 바탕을 둔 것인데,

(덕이라는 개념은, 말그대로 중용의 상태이자, 이 덕의 상태는 개인마다 다르기에, 

어떤 지식을 획득할 때, 각 주체들의 지성의 덕의 상태에 따라서, '지식'을 습득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기존의 전통적 인식론의 구도에선, 지식 정당화의 문제가 토대론에 입각해야 하는지 반토대론에 입각해야하는지 늘 문제가 있었다면, 이 지성의 덕은 토대론을 보다 건전히 보완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새로운 이론이 더 복잡스러운 인식론적 사태를 포섭할 수 있는, '렌즈'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 마디로 아무리 최고급 스마트폰이라도, 노트북의 기능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좋은 노트북이라도, 데스크탑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전히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만' 간주하고, 시작하는 인식론은 어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굉장히 복잡하다. 


이성적으로 설득하면,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직관을 과신하는 경우도 있고,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경우도 있고, 

알고도 속거나,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굉장히 복잡스러운 사태 속에 얽히고 섥혀있다. 


이러한 사태 속에서, 과연 우리는 '합리적'일까?란 의문이 강하게 제기된다. 


더불어 근현대의 여러 사상들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것이 합리성에 기인해서, '사상'이 출몰했다기 보다는,

상처 받거나 슬픔의 역사에서 나오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맑스의 종교비판은 당시 독일 지역 종교의 폐단으로부터 나오게 됐으며

니체 또한 그 역사와 사회적 흐름 속에서 어떤 울분으로 자신의 사상을 꽃피웠다. 

오늘날 페미니즘 또한 이러한 아픔이나 차별에 의한 상처의 흔적에서 나온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스스로 되묻게 된다. 

'나는 과연 합리적일까? 나는 과연 합리성으로 설득되는가?'

20대때만 해도, 당연히 '난 합리적이야!'라고 외쳤을텐데,

지금 30대 중반을 향해 가는 이 시점에,

(사회는 여전히 어린 나이로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론 신체 노화도 제대로 느끼며, 

솔직히 어린 나이는 아닌듯하다..)

인간군상 겪을 때로 다 겪고, 관계 안에서의 상처나 아픔 등등을 겪으며, 

'나는 사랑을 필요로하고,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존중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나 스스로도 '사랑'에 의해 움직이고, '존중 받을 때' 나도 덩달아 겸손해지는 것을 보며,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다시금 재고하게 된다. 

철학적 논쟁에서 무엇이 더 합리적인 의견인지를 따져 묻기 위한 것도 아니고,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기 위함도 아닌,

보다 더 온전하게 인간을 '사랑하고 존중'하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으로 한 발자국 더 성숙하게 된듯하다. 


이 공부를 통해, 누군가 울부짖고 부르짖을 때, 그의 주장이 논리적인지 합리적인지 따져 묻기보다,

그 전에, 그 사람이 왜 소리지르고 울부짖는지 그것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철학적 성찰이고,

다툼을, 보다 더 조화롭게 화해시키기 위해, 균형감 있는 시선을 갖추기 위해,

철학적 시선을 배운다는 것.


별개로..

특히나 요새 유튜브 댓글을 보면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때가 많다. 

이탈리아 유튜브나 영어권 유튜브를 보면, 이들의 댓글은 그저 영상을 더 재밌게 이해할 수 있는 '유머'이거나, 어떤 '풍자' 혹은 개인의 체험 나눔이라면,

우리나라 영상 댓글은, 논리와 상식을 운운하며, '비판과 조롱, 밑도끝도 없는 비난'이 주를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

대체 왜그런것일까.. 뭔가 한이 서린 느낌이랄까. 외국에서 살다보니,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한국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물고 뜯고 평가하고 급을 나누고 사는지 알 것 같다..

이러한 이면에, 다 '사랑 받고 존중 받고 싶어서' 난리를 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외면 받고 무시당하니, 인터넷에서 익명으로 누군가를 실컷 까며,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려는 보상심리일까..


결국 '존중과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더 깊게 느낀다. 


철학은 이성의 역사이기보다, 인간의 역사를 사상적으로 공부한다는 것. 

더 깊게 말해, 죽음을 향해 존재하는 인간 실존 역사를 공부하며,

무엇이 행복이고 어떻게 더불어 살까 고민하는 학문임을 다시금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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