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16) 지정헌혈①

개인정보 보호법과 탁상행정

by 에스

과거에는 지정헌혈이 훨씬 간단했다.

환자의 이름과 병원명, 혈액형만 알면,

헌혈의 집에서 헌혈을 진행하고 그 혈액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그러나 2021년 무렵부터,

개인정보 보호법을 이유로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지정헌혈을 하려면 이제 다음 절차를 따라야 한다.


병원에서 환자의 개인정보 제공 동의서 작성

병원 혈액은행에서 수혈자 등록번호 발급

등록번호를 가지고 헌혈의 집에 방문 → 지정헌혈 진행



절차가 극적으로 복잡해진 것은 아니지만,

보호자들의 이해도와 접근성이 뚝 떨어졌다.


%EC%A0%9C%EB%AA%A9_%EC%97%86%EC%9D%8C.png?type=w773 AI 생성 이미지(출처: chat GPT)





우리 병원은 2차 종합병원으로 고령 환자가 많고,

그만큼 보호자도 고령인 경우가 많다.


95세 환자의 보호자가 70세인 상황은 드문 일이 아니다.

보호자들은 처음부터 "우리는 헌혈할 사람이 없어요"라고 곤란해하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지정헌혈의 절차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의지가 있어도 지정헌혈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바뀐 제도는 솔직히 납득하기 어렵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만들어졌다지만,

오히려 도움이 가장 절실한 이들에게 가장 멀어진 제도가 되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걸 더 어렵게 만든 결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제도가 그 마음을 꺾고 있는 현실이다.




게다가,

개인정보 보호라는 명목으로 도입된 이 절차 안에서,

오히려 새로운 문제들이 불거지고 있다.


� 신상 유출에 매혈까지... 구멍 뚫린 지정헌혈 [경기일보 24.06.18]


보호자들은 지정헌혈자를 구하기 위해

환자의 병명, 혈액형, 수혈자 등록번호까지 그대로 인터넷에 올리고,

(이럴거면 개인정보 보호가 무슨 의미가 있나...?)

익명의 누군가가 이를 보고 헌혈에 나서는 사례가 실제로 존재한다.


문제는, 이게 단순한 ‘선의의 연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사에 따르면,

돈을 받고 지정헌혈을 해주는 '매혈'까지 이루어지는 상황이다.




개인정보를 보호하겠다며 만든 제도는

결국 신상 유출과 매혈이라는 또 다른 위험을 만들어냈다.

공식 루트가 닫힌 자리에서,

비공식 루트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런데 그마저도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알 수 없다.

출산율 저하로 20~30대 인구가 줄어들고,

실제 헌혈자 수도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14) 저출산과 의료의 연결고리]



혈액 수급의 가장 큰 기반이던 청년층이 줄어들면서

자발적 헌혈 자체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지정헌혈은 어렵고, 자발적 헌혈도 줄고,

그 사이에 끼인 건 결국 '환자'와 '그들의 가족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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