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의 길 고양이들

―01

by 유성

시 호준


⌈안 오니? 과외쌤 기다리시잖아.⌋


이틀 전, 재수 없는 졸부 아들 새끼가 시비 걸어서 한 대 값아 주려다 박살 난 아이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학교나 집이나… 죄다 숨통을 조여 오는 것뿐이다. 톡톡- 엄지로 화면을 쓸어, 그간 엄마와 했던 짧은 메시지들을 훑어보았다. 학교, 과외, 성적. 다정한 안부? 평범한 부모님의 걱정? 그딴 건 없었다. 내 의견은 일체 생각도 없다는 듯, 무언의 압박이 느껴지는 간결한 문장들. 거기에 일반적인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은 없었다. 이건― 프롬프터를 읽는 AI와의 대화일 뿐이다.


핸드폰을 쥐지 않은 손에서 종이가 무력하게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종이를 구기는 손등에 선명한 핏줄이 드러났다. 화가 나서 버틸 수 없었다. 이까짓게 뭐라고, 나는 차마 붉은 벽돌집의 대문을 열 수 없었다. 회색 우체통엔 밀린 집세, 각종 청구서들이 마구잡이로 꽂혀 있었다. 그러게, 하루 벌어먹기도 벅차면서 과외는 무슨… 주제를 알아야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차갑게 식은 손끝에 닿는 것은, 중학생 때부터 줄곧 쓰고 다닌 검정 비니의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빌어먹게도. 그 포근한 감각이, 호준을 더 비극으로 밀어 넣었다.


손아귀에서 벗어난 구겨진 종이는 그대로― 어젯밤에 내린 빗물을 머금은 아스팔트로 떨어졌다. 거기에는 전 과목 9등급이라는 처참한 성적이 표기되어 있었다. 이젠 상관없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어디선가 불어오는 무더운 바람에 종이는 금방 골목 아래로 날아갔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먼지처럼. 호준은 결심이라도 한 듯 단정한 교복 위에 입은 가죽재킷을 고쳐 입었다. 소년의 발걸음은 조금의 멈칫거림 없이, 곧장 골목을 내려갔다.


박 희찬


"야, 이 X새끼야. 개기냐? 덜 처맞았네 이거."


멀쩡한 간판 하나 없는, 온갖 쓰레기들과 버려진 전자기기들의 무덤. 한때는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들로 가득했던 상가 건물. 이제는, 거리의 부랑자들의 아지트가 됐다. 5층짜리 쌍둥이 건물을 잇는 낡은 육교 한가운데, 늦은 퇴근을 하는 차들의 경적소리에 묻혀― 엉망이 된 교복을 입은 소년이 무자비한 발길질에 고통에 섞인 신음을 토했다. 그를 둘러싼 대여섯 명의 양아치들은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내뱉으며 피떡칠을 한 소년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잘생긴, 무리의 리더 희찬이었다. 마침내 가여운 소년에 대한 흥미가 식었는지 짧은 스포츠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었다. 그런 희찬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띵- 무미건조한 디지털 알림음이 울렸다. 이내, 아무런 꾸밈도 없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더니 "X 같네…"라고 지껄였다. 그 말과 함께, 애꿎은 금이 간 벽에 주먹질이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기절한 소년을 비웃으며 저마다 발로 차던 무리들이 갑작스러운 둔탁한 소음이 난 곳을 돌아보았다.


"미친놈아, 왜 지랄인데?"

"잘 있어라. X신들아."

"…저 새끼, 이번엔 뭔데?"


도시의 암울한 기운을 잔뜩 머금은, 상가의 그늘에서 얼이 빠진 멍청이들을 뒤로하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가는 희찬이었다. 그의 주머니 속엔 여전히 화면이 켜진 스마트폰이 전화를 재촉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번엔 뭘로 맞으려나. 상관없지. 씨발, 이번엔 진짜 죽어버릴까.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진짜로.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백 서린


#영화제 #시상식 #레드카펫 #백여울 그리고― #울 언니.


명품샵에서 파격적인 할인 행사를 한다면, 진열대의 가방들의 시점이 어떨지 잠시나마 알 수 있었다. 우악스럽게 들이미는 수십대의 카메라, 시뻘건 불빛은 마치 도깨비의 눈과 같았다. 그것들이 동시에 발산하는 새하얀 섬광은 단 한 사람을 위해 쏘아졌다. 레드카펫 위를 한 마리의 백조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추는 발레리나 같은― 나의 언니, 백여울이었다.


"언니! 여기 좀 봐!"


스타와 일반인을 가르듯, 레드카펫 아래로 길게 늘어선 붉은 띠와 경호원들. 그 틈에서 작은 키의 소녀가 군중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방방 뛰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한 히메컷의 소녀를 행사장의 주인공, 백여울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녀의 동생 백서린의 스마트폰 카메라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그것은 좋아요 50만의 미소였다.


20층짜리 신축 아파트 단지의 중심에서, 삐걱거리며 그네를 타고 있는 서린은 팔과 다리를 쭉 뻗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아파트들은 저 하늘의 끝, 아니면 우주 너머를 향해 저격을 준비하는 샷건 부대와 같았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곳엔 일그러진 보름달이 떠 있었다. 음, 저런 모양이면 정확히 뭐라고 하더라. 과학시간에 늘 졸았던 나로서 그딴 건 잘 모르겠지만, 서린은 마음에 들었다.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난― 운 좋게 톱스타 백여울의 동생으로 태어났을 뿐이니까. 그 덕에, 일게 '일반인' 고등학생인 내가 10만 팔로워의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물론, 사람들은 백서린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나의 일상이 올라간 포스트는 겨우 5천의 좋아요였고, 조금이라도 여울의 흔적이 느껴지는 포스트는 단박에 50만, 가끔은 100만에 이르기까지 했다. 어쩌면 영원히 세상은 그녀를 '백여울의 동생'으로만 기억할지도 모른다. 서린을 내려다보는― 일그러진 달이,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서린은 그 달이, 자신과 같다고 느꼈다.


"사라지기… 싫어."


김 도하


"도하. 잠깐이면 돼.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다."

"도하야. 결정된 거지?"

"이것도 부탁할게. 너만 믿는다."


"응. 걱정 마. 그렇게 할게."


이건, 5지선다의 객관식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관식이나 그 어떤 논술문제도 아니었다. 그런 부탁들 앞에서 나는 언제나 같은 답을 적어내었다. 교과서에 쓰여있는 정해진 답을 외우듯. 언제부터인가 정답이 아닌 것을 써내는 것이 두려웠다. 정답을 원하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은 답을 얘기해 봤자, 점수를 잃는 건 늘 '나'였으니까. 아무도, 정답이 아닌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어차피 내 의견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면, 모든 게 평화로웠다.


"다음 주에 논술대회 준비는 다 됐지? 그게 있어야 총장도 인정할 거야."

"엄마, 그런데…"

"오늘 성적표 나왔다며, 어서 가져와. 숨길 생각 말고."


나는 분명 집에 있었다. 그런데, 왜 이토록 춥고 외로운 걸까. 시선은 줄곧 바닥을 향했고, 작고 여린 어깨에 걸친 파란 체크남방을 더 단단히 여몄다. 그러면 조금― 덜 외로웠다. 지금 타이밍이면 괜찮을까? 왼손에 들려진 빳빳한 종이의 무게가 갑자기 10kg 아령처럼 느껴졌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아무도 몰래 숨을 들이켰다. 그럼에도― 목구멍에 '정답이 아닌 것들'이 아우성쳤다. 무언가에 막혀 심장이 짓눌리는 듯했다. 숨소리가 일정하지 않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걸 뱉어내면, 분명 실망하겠지. 어쩌면 들은 채도 안 할 것이다. 그러면 나만, 상처받을 것이다. 바보처럼.


"야. 김도하! 어디가?"


확실한 건 이것 또한 정답은 아닐 거다. 딸랑하는 명랑한 종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쾅하고 닫혔다. 점점 흐려져가는 엄마의 외침이 금방 멎어 들었다. 순식간에 찾아온 적막 속에서 도하는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는 비겁한 겁쟁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이대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런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생각… 하기 싫어."


천 시아


⌈딸, 생일 축하해.⌋


도시의 모든 건물들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펜트하우스― 그 위에는 밤하늘의 빛나는 별들만이 자리할 뿐, 무엇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었다. 홀로 하늘에 우뚝 서서 다른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는 것은… 어쩌면 조금, 외로울지도 모른다. 어두컴컴한 집안은 오직, 간접조명만이 드넒은 집을 밝히고 있었다. 길고 높게 뻗은 통유리 앞, 새하얀 침대 위에 앉아 샤넬 가운을 걸친― 천시아의 기분이 딱 그랬다.


불 꺼진 주방의 아일랜드 탁자 위에, 유명 셰프가 직접 만든 수제 치즈케이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평소라면 눈에 불을 켜고 순식간에 먹어 치웠을 텐데, 오늘의 시아는 케이크라면 꼴도 보기 싫을 정도였다. 매년 10월 27일이면 자동응답기처럼 의무적인 메시지를 받는다. 같잖다. 진심 따위 느껴지지 않는 의무적인 문자. '괜찮은 부모' 라며 자위할 모습이 그려졌다. 순간,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안 그래도 하얀 손등이 핏기하나 없이 메말라 갔다.


고개를 돌려, 통유리 너머를 보는 시아의 눈이 무언가를 굳게 다짐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장인정신으로 제작한 잘 관리된 인형 같은 얼굴의 소녀는― 마침내, 가운을 벗어던지고 막이 내린 극장을 빠져나갔다. 관객은 베이지색 간접조명 아래, 그녀의 샤넬 가운만이 남아 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번 다시 도시의 마천루에 오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날이었다.


"X 같은… 생일을, X발 축하합니다."


자정 10분 전, 유성 편의점 앞.


밤하늘의 짙은 안개구름 속으로 하현달이 숨었던 날. 각자의 기구한 사연을 뒤로한 채, 다섯 마리 길 고양이들이 어느 영화의 대본처럼 같은 골목에 모였다. 형식적인 인사 따위는 없었다. 경계 어린 시선 속, 불편한 공기가 감도는 정적이 흘렀다. 그 끝에서― 대장을 자처하는, 까만 비니를 쓴 고양이가 말했다.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으로 가자."

"네가 뭔데."

"나? 시호준."

"… 누가 그걸. 아니, 하."

"저기― 저 건물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면, 기분 쩔겠지?"


대장 고양이의 하얀 손끝이 향하는 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그것은 정말로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이었다. 뾰족하게 솟은 그 끝은, 마치 하늘을 찌르는 볼펜처럼 보였다. 다른 어떤 건물들보다, 심지어 도시의 경계를 나누는 산 정상보다도 높은 곳. 천시아는 한참동안 그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형성된 달밤의 스카우트.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거절하는 이 또한 없었다. 어떤 일이 닥치든, 제발 그러길 바라는 것처럼. 이 도시의 길고양이들은, 살아갈 이유를 찾고 싶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