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 도시의 외로운 다섯 마리의 길고양이들은, 운명처럼 골목길로 모여들었어요.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모두가 쉬어가는 새벽.
어둑한 골목에 남은 녹색과 주홍색의 네온사인.
네모난 편의점 안이 웬일로 소란스럽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주민들만 근근이 이용하는 곳.
몇 년 간 재개발이니, 보상금이니 시끄러웠던 탓이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미 근처의 신도시로 이사했고,
남은 사람들은 노인들이나 갈 곳 잃은 부랑자들 뿐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알바를 구했던 건데…
한적한 계산대에 앉아 입이 째져라 하품하는 순간.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초면에 미안하지만.
인상 한번 사나운 고등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흐어‥ 어서 오세요."
급하게 입을 다물었지만, 눈물이 맺혀 시야가 흐릿했다.
분명 얼굴은 앳되어 보였는데, 행색은 영락없는 폭주족이었다.
백지장 같은 창백한 피부와 까만 비니, 가죽재킷은 대비가 극명했다.
하지만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두 눈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훨씬― 외로운, 이 도시의 길 잃은 맹수에 가까웠다.
서로의 시선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학생이 먼저 고개를 까딱 끄덕였다.
그것이, 그 나름 최소한의 예의였던 것이다.
나 역시 딱 그만큼의 희미한 미소로 보답했다.
남학생이 밀고 들어온 유리문이 채 닫히기 전.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서너 명의 고등학생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며 뛰어들었다.
"야, 학교 어디냐? 너도 때려치웠냐?"
굵직한 목소리가 편의점 전체를 울렸다.
그는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양아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까만 민소매에 드러난 근육질 팔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비니를 쓴 남학생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그가 처음으로 적의를 드러내며 신경질적으로 팔을 걷어냈다.
나에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비니를 쓴 학생은 분명,
"아, X발."이라고 읊조리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바나나우유 남아있죠?"
덩치 큰 근육질 남학생 뒤에서 그의 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키의 여학생이 하이텐션으로 내게 인사했다.
자로 잰 듯 일정한 길이의 히메컷 스타일에
선명한 고양이눈매 아이라인이 인상적인 학생이었다.
여학생의 질문에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뒤따라 들어오는, 앞선 여학생만큼 작은 체구의 남학생을 보았다.
그 아이는 기껏해야 열다섯 정도로 보였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은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의 고양이와 같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가득한 뽀얀 피부,
귀와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학생은 내게 공손히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손님은 한눈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잡티하나 없는 하얀 피부, 인형의 눈처럼 빠져들 것 같은 베이지색 눈동자.
부드럽게 뻗은 긴 속눈썹에, 입체적인 콧대, 도톰한 입술까지.
거기다 샤넬로고가 찍힌 실크 잠옷드레스는,
저 학생이 엠버서더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어느 부잣집의 도도한 고양이처럼
행동 하나하나에 세련된 티가 묻어났다.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나도 그처럼 발레의 한 동작을 연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추위를 이겨내는 하얀 입김이 고요한 골목길 안으로 스러졌다.
작은 달동네의 소박한 편의점 앞에 다행히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얼마간의 세월을 견뎠을까. 여기저기 긁히고 의미 없는 낙서가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을 만큼, 알바는 청소에 진심이었나 보다.
'서원♡태훈'
누군가 칼로 후벼 판 낙서 위에, 따끈한 호빵과 컵라면이 놓였다.
동시에, 정적을 견디기 힘들었던 박희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네가 왜 대장이냐?"
화가 난 건 아니었으나, 그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다만,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 태연하게 후루룩 라면을 먹는 시호준만은 달랐다.
한 번도 끊지 않고 면발의 끝까지 도달할 동안, 호준은 눈동자만 도륵 굴렸다.
마치 "귀찮게 왜 그러냐."는 듯, 그것이 희찬을 자극한 것이다.
거친 야생의 길고양이들은 그런 식으로, 영역싸움을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스트리트 파이트.
가장 먼저 유효타를 날린 건 예상대로 희찬이었다.
익숙한 듯 화려한 복귀전을 치르는 링 위의 챔피언처럼.
그의 체중이 한껏 실린, 묵직한 주먹이 호준의 명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런데 고통을 호소하며 고꾸라진건, 다름 아닌 희찬이었다.
"X발 X 같은 거."
경기장의 1열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순진한 눈망울의 김도하―
놀란 숨을 참는 듯, 얼음컵에 담긴 블루레몬 에이드를 홀짝였다.
작은 소년의 시선이,
낡은 가죽재킷의 어깨를 터는 시호준을 향했다.
그의 하얗고 고운 손에 들린 공사장 벽돌이 퍽- 하고 떨어졌다.
그 순간 테이블 위의 누구도 호준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호준이 다시 테이블에 앉았을 때, 희찬이 성큼 거리며 다가왔다.
여전히 피가 흐르는 손으로 망설임 없이 호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거, X 같은 새끼네."
꼼짝없이 붙들린 호준의 발끝이 애처롭게 땅 위에서 흔들렸다.
그때까지도 호준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의 반응은 오로지 희찬을 자극하는데 특화된 것 같았다.
"이번엔 진짜로, 맞자."
그 말과 동시에 호준이, 날이 선 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도통 표정을 보이지 않던 그가 가면을 벗었다.
즐거운 듯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그 끝엔 서늘한 조소가 스쳤다.
그건 마치, 구미호의 환생 같았다.
"라면 다 불었잖아. X발아."
이틀 전, 소나기가 남기고 간 골목은
습기 찬 쓰레기봉투와 하수구의 역한 냄새가 가득했다.
"야― 대체 왜, 굳이 뒷길로 온 건데?"
백서린은 멀거니 앞서가는 '대장' 시호준의 뒤통수를 째려보았다.
인정머리라곤 조금도 없는 그를 따라잡으려 그녀는 거의 뛰어야 했다.
그 와중에도 서린은 악착같이 앞머리를 사수하려 애썼다.
그 모습에, 여전히 분노에 차 투덜대던 희찬이 작게 감탄할 정도였다.
그들은 먼저, 골목길을 벗어나 큰길로 나가는 것을 첫 목표로 삼았다.
편의점 앞의 1차선 도로를 따라, 그대로 주택가를 지나면 되었다.
그런데 호준이 반대를 했고, 일행은 저만치 멀어져 가는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희찬이 던진 말에, 모두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싸패 새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호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천천히 일행들을 향해 뒤를 돌았다.
박희찬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저 냉혈한이 겁나서가 아니다.
얼음장 같던 대장 고양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있잖아. 난 여기가 싫어."
서린은 그들 중 호준과 가장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그의 날카롭던 눈빛에서 일순, 총기가 사라진 것을 보았다.
심지어는 그가 울지는 않을까 걱정되기까지 했다.
시호준의 가면이― 또 한 겹 벗겨졌다.
이번엔 외로운 늑대도, 구미호도 아니었다.
"사거리 횡단보도 앞까지 시합하자. 나보다 먼저 도착하면 질문권을 줄게."
그도 언젠가는 천진했던 순간이 존재했을 터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 형태로 올라갔다.
경계 어린 날카로운 눈매가 거짓말처럼 호의적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그 소년은 골목의 유일한 가로등 아래서, 밝게 웃었다.
이번에도 누구의 동의도 없었지만 아무도 거절하지 않았다.
자정이 지난 시각의 골목길은 어두웠다. 하지만 거기에 누군가 있었다.
서로를 밀치고, 소리치고, 장난치는 다양한 멜로디가 너울거렸다.
골목의 누군가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지만, 그것마저 화음에 불과했다.
이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린 살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