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형도 「흔해빠진 독서」를 읽고
그 제목만큼이나 흔해빠진 시였다. 기형도는 책 읽다가 시를 써도 잘 쓰는구나. 라고 그냥 넘어갈 뻔했다. 지금 현재 (2025년 11월 7일 금요일 오후 4시 56분 38초) 읽지 않았다면.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된다.”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시는 독서가 아니라 체험된다. 예술이 나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때, 우리는 그것을 더욱 깊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의 예술은 감상이나 평가의 영역이 아닌, 무한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작가와 나의 합일을 체험하는 새로운 경지로의 도달이다. 쉽게 말해서, 연인과 헤어지고 이별 노래 들으면 다 내 얘기 같다.
화자는 언제나 그랬듯, 휴일을 맞아 “수북한 턱수염이 매력적인” 저자가 쓴 “두꺼운 책”을 읽는 중이다. 그 순간, 마침 내 눈 앞엔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이 놓여있다. 그 저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불행한 생을 보냈다.” 멜빌은 평생 글을 썼지만, 처음 두 책 정도를 제외하곤 전부 비판과 비난에 시달리다가 작가로서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화자와 동시에 읊조린다. “위대한 작가들이란”. 멜빌은 실제로 “몇 개의 도회지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하기도, “엎질러진 것이 가난뿐인 거리에서 일자리를 찾”기도, “누구보다 인생의 고통을 잘 이해”하기도 했다. 시 안의 화자가 읽던 책과 시 바깥의 내가 읽던 책이 일치하고 나와 화자는 하나가 된다.
그렇게 나는 시 세계로 들어갔는데, 화자는 책과 갑자기 거리를 둔다. 분명 “위대한 작가”라면서, “종잇장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게 관심이 없”댄다. 나와 화자의 융합이 해제되고 다시 시 바깥에서 시를 볼 때, 나는 기형도 시인 본인이 이 시를 쓰던 순간의 위기의식을 느낀다. 자기한테 관심이 없는 작가를 읽다가 “손가락들”이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이유가 책을 대충 빨리 읽기 위함은 아니겠고, 뒤이은 “그 누가 나를 빌려가겠”냐는 물음에서 그 답이 보인다. 어느새 화자는 자신과 책의 작가를 동일하게 취급한다. 그렇게 화자가 작가가 되는데, 여기서 시인 기형도가 화자와 겹쳐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앞서 손가락들이 성급했던 건 시인 본인이 시를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대에 “틀림없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을 독자들을 위해.
미안하지만, 기형도는 틀렸다. 그의 사후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잎 속의 검은 잎』은 증쇄를 찍어내고 있다. “분명 감동적인 충고를 늘어놓을” 책을 덮고 굳이 “저녁의 거리”로 나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현실을 마주 보며, 휴일에 책이나 읽고 시나 쓰는 자신의 “무시무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이냐며 냉소를 보냈던 시인은 자기도 여느 이른바 위대하다는 작가들처럼 “쓸모없는 죽은 자”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생애는 이해하기 쉽”고, 다른 사람들처럼 겸손한 죽은 자가.
미안하지만, 또 틀렸다. 당신의 생애는 전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분명 기형도의 시는 “너무 많이 읽었”는데 또 읽고 또 읽는다. 흔해빠진 독서를 하고, 흔해빠진 시를 썼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기형도는 전혀 흔해빠지지 않았다. 이건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