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체리 Jun 20. 2020

김밥은 소풍과 함께    나에게로 온다




소풍은 이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새벽 공기가 스르르 들어온다. 뽀얀 밥물 냄새와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공기를 따라 들어오는 것도 같다. 아이는 잠자리에서 번쩍 눈을 뜬다. 그리고 몸을 반쯤 일으켜 머리맡을 본다. 과자 봉지 몇 개를 미리 넣어두어 배가 꽤 불룩해진 소풍가방이 보인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간다.


새벽이 다 물러가기 전, 아직 찬 공기가 느껴지는 부엌에는 이미 동그랗고 두툼한 노란 계란 지단이 수북하니 쌓여 있고  밥솥에서는  소리를 내며 김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등만 보이는 어머니는 숫돌을 꺼내 슥슥 칼날을 고 있다.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소림사 주방장만큼이나 비장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머니의 표정 따위는 챙길 틈이 없다. 결전의 날이 시작된 것이다.


그날은 아이의 소풍날이었다.  아버지는 새벽벌써 집을 나섰을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아침밥으로 된장국을 주로 드시기 때문에 애초에 아이의 경쟁상대가 아니다. 어머니가 김밥을 썰기 시작할 때까지 형제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이는 분홍 소시지와 누런 단무지가 삐죽 삐져나온 김밥의 꽁다리를 혼자 먹을 수 있게 된다. 아이는 소리 없이 말갛게 세수를 하고 그림자처럼 부엌 바닥에 스르르 앉는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공기와 냄새에 홀려 형제들이 차례로 일어나고, 어머니의 김밥을 독식하려던 아이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김밥은 당근 맛으로 먹는 거여"


도시락을 싸가던 시절, 우리 형제들의 도시락 반찬은 90% 김치였다. 우리 집에 이렇게 많은 김치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매일 먹어도 그다음 날 도시락통을 열면  또 김치가 얄밉게 시시 웃으며 나를 맞았다. 냉장고 가장 밑단에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김치통을 발로 차 깨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도 내 반찬을 먹지 않아 풀이 죽은 채로 집에 돌아와 도시락통을 개수대에 집어던진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러나 소풍날 만은 달랐다. 그날만은 도시락통 뚜껑을 열면서 미리 기가 죽지 않아도 되었다. 어머니의 김밥은 정말 맛있었다. 매일 햄과 소시지를 싸오던 부잣집 친구의 표정을 흉내 내며 능글능글하게 친구들에게 김밥을 나눠도 될 만큼. 친구들의 '맛있다'는 말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여유 있는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나중에 알았지만, 그 맛의 비결은 당근에 있었다. 어머니는 일단 당근을 매우 가늘게 채를 썰었다. 그리고 채칼을 사용하지 않고 썰 수 있는 최대치만큼 가늘게 썬 바로 그 당근을 볶으면서 어머니는 두 가지를 더 넣었다. 하나는 곱게 간 마늘이고 또 하나는 진간장이다. 센 불에 달궈진 프라이팬에 가늘게 썬 당근을 넣고 재빨리 볶으면서 마늘과 진간장을 넣어주면 꼬들꼬들하고 특유의 풍미가 살아있는 당근이 완성되는 것이다.  


어머니 김밥의 감칠맛의 비밀을  알아낸 후, 나도 몇 번 비슷한 방법으로 당근을 조리해 봤는데, 아무래도 어머니의 손맛과는 다른 맛이 났다. 혹시 맛소금을 첨가한 것이 아닌지, 아니면 특정 브랜드의 진간장을 넣은 것이 아닌가 하고 몇 번 어머니를 슬쩍 떠 봤지만, 매번


"그냥 간장(요즘 진간장)이여, 간장"


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좋다고 하셨다


언젠가 어머니가 싸준 김밥이 먹고 싶다고 어머니한테 말한 적이 있었다. 시골에 내려가면 좀 얻어먹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어머니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냥 사서 어라.'


어머니가 나이가 드셔서 입맛이 변하셨나? 아니면 마흔을 훌쩍 넘긴 딸이 팔순 어머니를 부려먹는 게 괘씸하신가?  처음에는 조금 섭섭했지만, 조금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이제 정말 김밥이 싫어지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 남매가 봄, 가을로 소풍을 두 번씩만 가도 일 년 열두 번이다. 늘 우리의 아침밥 챙겨주시던 어머니였지만, 소풍 때만큼은 적어도 평소보다 두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 하얀 쌀밥을 씻어 안치고 미리 다듬어 두었던 시금치를 데쳐 두고 나면, 이제 무시무시한 양의 칼질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팔뚝만 한 누런 통단무지를 가느다랗게 썰고 나면 밀가루가 반이던 분홍 소시지를 단무지 양만큼 또 잘라야 했을 것이다. 스무 줄이 넘는 김밥을 싸고 그것을 또 칼로 썰고 그 위에 참기름을 바르고 깨를 뿌려야 했을 것이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양푼에 담긴 김밥을 아침으로 먹고 다들 흩어진 후에야 어머니는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온 솜이불처럼 무거운 몸으로 출근을 하셨을 것이다.


 나에게는 소풍날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였던 김밥이 어머니에게는 젊은 시절의 고된 육아와 돌봄 노동을 의미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아이였던 나는, 어머니가 그날 어떤 표정으로 집을 나섰는지, 공장에서 졸린 눈을 몇 번 비볐는지,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이 흘리고 간 밥알이 흩어진  방바닥을 엎드려 닦으면서 땀을 몇 방울이나 흘렸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며칠 후 어머니를 만나러 시골에 내려갔을 때, 요즘 부쩍 외식을 좋아하는 어머니의 변화된 음식 기호에 맞춰 우리는 김밥 대신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어머니가 집에서 싼 김밥보다 짜장면을, 그것도 중국집에 사 먹는 짜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날 왜 김밥을 먹지 않았을까


 딱 한번 국민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내 소풍에 따라온 적이 있었다. 소풍날 아침, 나는 공장에 다니던 어머니에게서 직장 때문에 내 소풍에 따라올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잘 모르겠다. 그때는 왜 어머니가 자녀들의 소풍에 따라와야 했는지를. 아마도 학급당 학생 수가 70명이 넘어가던 시절이고, 대부분의 중산층 정도의 어머니들은 전업주부를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은 엄마와 오순도순 김밥을 먹을 시간에 3학년이던 언니와 단둘이 점심을 먹을 생각을 하니 창피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 입에서 공장 대신 소풍에 가겠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악을 쓰며 울어댔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의 두꺼운 손바닥으로 귓방망이를 얻어맞았고 볼때기에서 느껴지는 뜨거움과 얼얼함이 어느 정도 가신 후에야 여덟 살 꼬마는 현실 직시를 했다. 울어도 안 되는 일이 있고, 우리 집은 친구들 집과는 다르다...


그날 소풍은 결국 아버지가 따라왔다. 소풍에 대한 기억으로 아버지가 등장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장면이다. 양산을 쓰고 곱게 화장한 어머니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소풍 행렬을 따라오던 아버지. 매우 칙칙해서 마치 작업복 같아 보이는 회색 셔츠를 입은 아버지가 잘 따라오고 있나 몇 번을 돌아봤는데 아버지는 땅만 보고 걸어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아이들은 각자의 엄마에게로 구슬 알처럼 흩어졌고 그때쯤 이미 나는 김밥이 담긴 도시락 뚜껑을 열 생각에 신이 나서 아침에 아버지에게 볼 싸대기를 맞은 기억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 날, 아버지는 김밥을 한 덩어리도 드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손으로는 소나무 잔가지를 쥐어뜯고 눈으로는 먼 산을 쫓고 있었다. 나중에 아버지는(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일을 떠올리면서 태백에서 안양으로 이사 온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고 말했다.


당시 태백의 광산 경기는 호황이었지만, 열 집 걸러 한 명씩은 갱도가 무너져 매몰되던 시절이었다. 광부였던 아버지는 다섯이나 되는 딸들이 광부와 결혼해서 과부가 될까 봐 더럭 겁이 났다고 한다. 여섯 남매를 데리고 일곱 시간이 넘게 기차를 타고 안양으로 이사 온 날 밤에는 고만고만한 애들을 도시의 일용직 인부 월급으로 키울 생각에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내 소풍날 아버지는,  아내를 일터로 내몰고 자식들을 남들만큼 뒷바라지 못해주는 못난 가장이 된 자신을 확인했어야 했다. 그날 아버지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눈물이 나와서 김밥을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를 지킨 건, 한 줄의 김밥이다


 소풍날 그 김밥 덕분에 김치 반찬만 매일 싸가던, 가난한 집안의 막내였던 여덟 살의 그 아이는 한 가닥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서른아홉 살의 그때 그 어머니도 지금쯤 막 도시락 뚜껑을 열어서 자신이 싸준 김밥을 먹고 있을 막내의 신난 표정을 떠올리며 그 힘든 공장일을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마흔 살의 그때 그 아버지도 공장에 간 아내가 싸준 김밥을 먹고 있는 자식의 오물거리는 입을 보며 가장으로서의 고된 삶을 놓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때 그 김밥의 힘으로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고 단단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를 딱 하루지만 아싸에서 인싸로 거듭나게 해 주었던 그 김밥, 부모로서 자식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담고 있었던 소풍날의 그 김밥나는 지금도 정말 다시 꼭 먹어보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