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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체리 Jun 09. 2020

11월

                                            

11월은 매년 나에게 특별했다





"읍내 안과에 가봤는데 좀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네. 자식들이 서울에 있다고 하니 종이 한 장 써주더라."     

작년 11월, 시골에 계신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날은 딱 시험 이주 전이었다. 가슴이 덜컹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엄마가 우리 집에 올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늘 시험은 12월 초에 있었다. 11월은 파이널 모의고사를 보고 전체 내용을 요약정리하며 체력 관리에도 힘써야 할 중요한 시기이다. 불합격이 계속되면서 염치가 없어진 나는, 아프다는 둥, 특별 출근을 해야 된다는 둥의 핑계를 대며 11월 달력에 빼곡히 적혀있는 가족행사에서 요리조리 빠져나와 몰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들 병원에서 가깝고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다고 생각되는(사실은 그렇지도 않지만) 내가 엄마의 병간호를 할 가장 적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1월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세끼 밥을 챙겨드리고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며, 문병 오는 형제자매들에게 커피와 과일을 대접하면서 중요한 11월의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자 갑자기 확 짜증이 몰려왔다.  

    

"엄마, 지금 당장 뭐 어떻게 되는 거 아니니까 한 달 후에 오시면 안 될까? 12월 중순에 모시러 갈게"

엄마는 조금 망설이시더니, 기다릴 수는 있지만, 요즘 눈이 좀 뿌옇고 앞이 잘 안 보이는 것 같아서 한 달 후까지 기다리기 불안하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일단 좀 생각해본다고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분노와 억울함이 내 목구멍의 울림통을 거쳐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족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이어갔던 수험생활이 초고속으로 재생되면서 그동안의 울분이 한꺼번에 터졌다. 한참을 엉엉 울고 나니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때서야 엄마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나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목을 가다듬고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어. 얼마 전에 니 얼굴 보니 핼쑥한 게 요즘 많이 몸이 안 좋아 보이더라. 둘째가 어렵사리 휴가를 냈대서 그 집에 있기로 했으니 걱정 말어. "     

다행이다. 엄마는 나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나는 일단 엄마가 우리 집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엄마는 둘째 언니네 집으로 오셨고 나는 무사히 모의고사를 보러 갔다.   

  

스터디 모집- 초수/기혼자 제외     

     

수험생 사이에서 기혼자는 쌩초보 초수와 같은 레벨이다. 아이가 아파서 혹은 김장 때문에 스터디를 빠지는 기혼자를 환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기혼 수험생 또한 가사노동과 공부를 병행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감당해보려고 버텨보지만, 집안의 큰 이벤트와 맞닥뜨리게 되면  갑자기 평정심을 잃게 되기도 한다.       

     

아마도 11월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같이 내가 울었던 이유는. 매년 11월은 하루하루가 너무나 절실했다. 11월 달력에 쓰인 30이라는 마지막 숫자를 50 정도로 바꿔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50이 아닌 100으로 늘여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매일 모르는 내용이 갑툭튀 했고 틀린 문제, 잘못 이해한 문제가 속출했다. 결혼식, 김장, 생신 등의 행사를 거짓말과 농땡이로 때우다 보면 어느덧 결승선 코앞에서 진이 빠진 채 12월을 맞이했다.      

     

시험을 포기한 올해는 가족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김장도 척척 해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 든다. 특히 주말에 쏟아지는 여유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부담스럽다. 주말 전용 스케줄표라도 만들고 싶은 심정이다. 그동안의 11월의 불안감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욕망과 이기심과 불안감을 고스란히 확인해주었던 그 11월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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