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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 권력 구조 속 매몰된 개인의 본질

션 베이커, <아노라(2024)> 리뷰

by 새시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노라>는 뉴욕의 스트리퍼 ‘애니(미키 메디슨 분)’가 러시아 재벌(올리가르히) 2세인 ‘이반(마르크 예이델시테인 분)’과의 짧은 만남 이후 결혼을 하게 되지만 이를 무효화하려는 부모가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자본주의라는 권력 구조 속에서 ‘재벌’과 ‘스트리퍼’라는 극단에 놓인 이들의 관계와 이를 구성하는 여러 관계들을 통해 어떻게 인간의 ‘본질’이 권력 구조 속에 매몰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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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것


‘션 베이커’ 감독은 <아노라>가 권력 구조에 관한 이야기라고 언급하였다. 실제로, 본 작품은 내내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인 ‘애니’와 ‘이반’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애니’에게 사랑을 말하며 청혼을 한다. ‘애니’는 이에 대한 마음이 가벼운 것임을 알기에 거절하지만, 지속되는 설득으로 승낙을 하여 결혼을 하게 된다. ‘애니’에게 이는 엄청난 일이며, 모든 것을 바꾸는 일이다. 하지만, ‘이반’에게는 아니다. ‘이반’의 화난 부모가 그를 찾으러 미국에 온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혼자 도망가버린다. 인생을 걸었던 ‘애니’는 그를 찾기 위해 발악하지만, 이후 만난 ‘이반’의 말은 전혀 다른 말이다. ‘재밌었으니 되었다.’는 그의 말은, ‘애니’에게는 전부를 걸어야 할 만큼 큰 사건이었지만, 그에게는 한낱 ‘유희’였음을 알려주며 그들이 가진 권력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반’과 그의 하수인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반’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사고를 치지만, 그들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견인되던 차를 탈취하는 등 위험을 감수하고 늘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반’의 가족에서도 보이는데, ‘애니’가 ‘이반’의 어머니 ‘갈리나 자카로바’에게 비난을 가하는 장면에서 ‘이반’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자카로프’가 호탕하게 웃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기 아내가 모욕을 당하는 상황이지만, 그에게는 그것마저 별 거 아닌 단순한 웃음거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반부 ‘애니’와 하수인 3인(‘토로스(카렌 카라구리안 분)’, ‘가닉(바체 토브마샨 분)’, ‘이고르(유리 보리소프 분)’)가 ‘이반’을 찾기 위해 떠나려는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들의 의도는 다르지만 목적은 같은 기묘한 동행이 기묘한 로드 무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강한 권력 구조에 눌려 있던 그들이 모여서 이러한 동행을 하는 장면들은 약간의 동료애까지 느껴지는데, 이는 다소 무법에 가까운 ‘밤’이라는 환경과 어우러져 해방감을 주기도 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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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음 속에 가려지는 본질


<아노라>는 배경 음악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작품이다. 그 대신 주변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배경 음악처럼 활용한다. 어떠한 장면에서는 타인들의 대화가, 어느 장면에서는 아이의 울음이 이렇게 기능한다. 후반부 '애니'와 '이고르'만이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도 TV에서 나오는 말소리가 내내 등장한다. 이는 주인공 '애니'의 목소리를 가린다. '애니'는 자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표한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몸을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성노동자'라는 꼬리표에 가려진다. 그의 외침이 타인의 말소리에 가려져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애니’가 어떠한 말을 해도, 타인에게는 ‘이반’의 돈을 보고 유혹한 매춘부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로 결혼을 먼저 이야기한 것은 ‘이반’이고, ‘애니’는 이를 의도한 바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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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을 때


작품 초반, '애니'는 주체적인 존재로 보인다. 자신의 몸과 시간을 원하는 '이반'에게 금전적인 대가를 구체적으로 요구하며, 원하는 바를 얻는다. 허나 항상 그 이상을 제공하는 '이반'에게 사랑에 빠지며 이러한 주체성을 잃게 된다. ‘애니’의 목적이 순수한 사랑만은 아니었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사랑은 진실이었다. ‘이반’을 찾는 과정에서의 ‘애니’는 주체적이지 않다. ‘이반’에게 확답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권력 구조의 넓은 그물망 안에서는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역설적으로, 사랑이라는 꿈에서 깬 이후의 ‘애니’는 다시금 주체적인 모습을 되찾는다. 자신의 뜻으로 자발적으로 혼인 무효에 동의하며, ‘이반’의 어머니인 ‘갈리나 자카로바’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많은 사건 속에서 그의 본질은 잡음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애니’가 본명인 ‘아노라’로 드러나는 것은 극 마지막이 되어서다. ‘애니’가 아니라 ‘아노라’가 더 좋다는 ‘이고르’의 옆에서, 자본주의라는 권력 구조와 동떨어진 오래된 차 안에서 ‘이고르’는 ‘아노라’에게 몰래 챙겨두었던 ‘이반’과의 결혼반지를 쥐어준다. 이 모든 사건들이 한낱 꿈은 아니었다고 위로하듯이. 이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위로 속에서, ‘아노라’는 미숙하게 자신이 가진 권력인 섹스로 보답하고자 한다. 그가 억눌렸던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와 입을 맞추려는 ‘이고르’를 제지하고 몇 번 때린 후 그에게 안겨 그저 울기 시작한다. 영화 내내 '아노라'의 말을 가리던 수많은 대화들이 없는 이 공간에서, 이러한 울음은 자신을 억눌렀던 권력 구조와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습이자, 그렇게 존재하게 된 ‘아노라’의 인간으로서의 본질인 것이다.


<아노라>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비롯한 ‘션 베이커’ 감독의 이전작들과 비슷하게 성노동자라는 민감한 소재를 주 소재로 다루는 작품이다. 감독은 성노동도 노동임을 말하면서도 그들이 선인이라 말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이 지닌 욕망을 좇아가고, 같이 무너지며 권력 구조의 아래에 위치한 존재들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들의 삶 역시 희로애락으로 쌓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작품은 ‘매춘부’라는 음란한 이미지만이 가득한 존재 역시 인간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를 넘어 편견 속 존재들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 제7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션 베이커), 여우주연상(마이키 매디슨), 각본상, 편집상 수상, 남우조연상(유리 보리소프)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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